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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Nov 22. 2024

"어떻게 지내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영화 <룸 넥스트 도어> 원작 소설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

2주 전에 큰아들과 함께 영화 <룸 넥스트 도어>를 보고 왔다. 분위기, 배우의 연기, 대사, 메시지까지 내 취향의 영화였다. 암으로 죽음을 앞둔 여자를 보며 5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나의 큰언니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욱 영화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죽어가는 친구 곁을 지키는 여자를 보며 언니 곁에 더 자주 있어주지 못한 나를 탓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죽음을 택한 여자는 영화 속에서 빛났다. 멋있었다. 나의 마지막도 저렇게 단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여운이 가시기 전, 영화의 원작 소설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를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 틈틈이 잠자리에서 읽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추천이 있어 더욱 신뢰가 갔다. 평소에는 원작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데 이번엔 영화가 먼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엔 소설보다 영화가 더 좋았다. 영화에 더 몰입했다. 영화의 화려한 색감 때문인지 영화의 기억이 강렬하다. 


영화에서는 암에 걸린 여자가 쨍하게 노란 슈트를 입고 빨갛게 입술을 바른 채 죽음을 맞이한다. 준비가 된 죽음이다. 소설은 다르다. 마지막을 죽음으로 끝맺지 않았다. 소설에서는 친구의 죽음을 바라보는 여자의 이야기가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보다 다른 이의 고통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더 자세하게 그려진 듯하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다.


나는 애를 썼다.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
실패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p.252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기로 한 여자는 사랑, 명예, 연민, 자부심, 공감, 희생, 이런 마음으로 이런 가치를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말인가 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해가 되지 않고 그것들을 다 온전히 지켜내는 데에는 실패하더라도 그 마음으로 애를 썼다는 것에 자족하는 듯한 마무리다. 작가의 문체가 가끔은 좀 어려웠다. 엄청 많은 사연을 단편적으로 툭, 툭 내보이는데 어떤 건 이해가 되고 어떤 건 그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 독서력의 한계일지도.


너무 겁먹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다고. 발버둥 치고 고함을 지르며 세상을 뜨기는 싫어. 아, 안돼. 왜 나야! 왜 나냐고! 울분을 터뜨리며 비난하고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어? 공포로 반쯤 정신이 나가서 말이야. (p.87)

난 강해지고 싶었어. 내가 알아서 제어하길 바랐어. 가능한 한 세상에 누를 끼치지 않고 내 식대로 죽고 싶었다고. 평온함을 바랐어. 질서 정연함을 바랐고.
주변이 평온하고 질서 정연함을 바랐을 뿐인데.
차분하고 말끔하고 품위 있고, 심지어-안 될 게 뭐야?-아름다운 죽음.
내가 생각한 건 그것이었는데.
어느 멋진 여름 밤, 풍광 좋은 마을의 훌륭한 집에서 맞는 아름다운 죽음. (p.211)


언니도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의 죽음을 상상하면 나도 이런 마음이 든다. 최대한 의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지막을 우아하게 준비하고 싶다. 마음은 그런데 사실 자신은 없다. 내가 원하지 않는 때에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덜컥 내 앞에 와버린 죽음 앞에서 과연 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죽음이 두렵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죽음 앞에서 겁먹고 허우적거릴 것만 같다. 아름다운 죽음... 가능할까?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Quel est ton tourment?
p.122


'어떻게 지내요?'라는 안부를 묻는 흔하디 흔한 인삿말이 프랑스어로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라고 쓰이나 보다. '어떻게 지내요?'는 '잘 지내요' 또는 '그럭저럭 지내요' 정도의 답을 원하는 질문 같다. 그런데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라고 물어보면 우선 눈물이 날 것 같다. 한 마디 물음에 열 마디는 하게 될 것 같은, 그야말로 위대한 질문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물으며 살고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건넨 적이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은 마음이다. 


어떻게 지내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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