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

과거의 내가 아니야

by 유쾌한 주용씨

나이 사십이 넘어 시골 중학교 동창회에 나갔다. 술 마시는 자리에서 평소처럼 ‘참이슬 빨간색’을 달라고 했다. 나를 충청도 사투리도 쓰지 않는, 새침떼기 모범생으로 기억했던 친구들이 놀랐다. 술 좀 마신다는 남자 동창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빨간 딱지는 오십은 넘어서 마셔야 되는 거 아녀?'하며 웃었다. 독한 참이슬 클래식은 나이 좀 지긋한 남자가 마셔줘야 어울리는 술이란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렸을 적 친구들이 술 잘 마시는 나에게 보이는 반응이 싫지 않았다. 반전 매력쯤 되는 줄 착각했다.


학원 원장 시절 새로 들어온 강사와 회식 자리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술집 종업원에게 참이슬 빨간색을 주문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유부녀였던 그 강사가 나와 회식한 날 집에 들어갔더니 남편이 “학원 원장이 여자라며? 어때?” 라고 묻더란다. 그래서 “참이슬 빨간색 마시더라”했더니 그 남편 왈, “아~~~” 하더란다. 독한 소주 마시는 여자 원장, 단번에 파악이 됐었나 보다. 나를 강하고 쎈 여자로 봐주는 시선이 싫지 않았다. 술 덕분이라 여기며 음주와 함께 나의 사회 생활은 이어졌다.


가끔씩 안부를 전하고 얼굴을 보는 여고 동창들은 오랫동안 음주 생활을 이어가는 나를 부러워했다. 나이 먹어가며 몸이 안 따라줘서 직장 다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너는 어떻게 그 독한 소주를 매일 마시면서도 그렇게 쌩쌩할 수 있냐며 신기해했다. 친구들이 맥주를 마실 때 내 남다른 체력을 뽐내며 혼자 소주를 마셨다. 여고를 졸업하고 30년, 동창들에게 나의 이미지는 술 잘 마시고 웃기는 친구다.


나는 사남매 중 셋째 딸이다. 20대부터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역할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가족 모임에 가면 술 한 잔 마시고 떠들어대는 내 주변으로 친척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두 언니는 나를 방패 삼아 구경꾼이 되었고 나는 기꺼이 모임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어도 우리 가족들은 나를 웃기는 애, 술 마시고 거침없는 입담으로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막내 취급을 한다. 아주 싫은 건 아니지만 고정화된 나의 이미지가 부담스럽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쓰는 자신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성인이 된 후에 내 이미지는 술과 함께 굳어졌다. 술이 있어서 친하게 된 사람도 있고, 술 덕분에 끈끈하게 지속되는 관계도 있다. 내가 이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럼 이제부터 만나서 뭐하지?”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네가 술을 안 마시면 분위기가 안 살지?”하며 끈질기게 술을 권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한동안 유혹에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주를 결심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를 위한 결정이다. 술을 끊고난 후의 나의 모습이 궁금하고 앞으로 다르게 펼쳐질 나의 삶이 기대된다.


처음 다이어리에 단주 결심을 적기 시작해 브런치, 블로그에 선언문을 게시했다. 카톡에는 올해 마지막날까지 단주 D-day를 표시하고 카운팅하고 있다. 함께 사는 가족에게 내 결심을 전하고 적극 협조해 달라는 당부도 일러두었다. 가까운 술친구에게 당분간 만날 수 없다는 의미를 담아 내 계획을 전했고 만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글로, 말로 여기 저기 소문을 내고 있다. 나의 단주 선언에 사람들의 반응이 참 다양하고 재미있다. “네가 과연?” 하며 믿지 않는 사람도 있고, “건강을 위해 잘 한 결정이야” 라며 응원하는 사람도 있다.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 못해서 아직 전하지 못했지만 내가 술을 끊는다는 걸 가장 믿지 않을 사람이 바로 나의 형제들이다. 만나는 자리마다 술이 빠진 적이 없었고, 20대부터 술 마시는 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해서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가끔씩 술을 안 마시겠다는 선언을 했지만 얼마 못 가서 다시 술잔을 들고 전보다 더 많이 마시고 더 빨리 취했다. 그런 내가 이번에 술을 또 끊겠다고 하면 우리 형제들은 ‘제가 또 저러는구나’ 하면서 흘려버릴 것이다. 이제는 감정기복 심한 동생, 믿음이 안 가는 막내누나, 철없는 처제의 이미지를 좀 벗어던지고 싶다.


노래 가사처럼 보여주고 싶다. 완전히 달라진 나를. 나의 생활이나 마음을 직접 보여줄 수는 없으니 우선 단주와 함께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달라진 몸을 보여주는 게 가장 확실하다. 절대로 끊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던 사람들에게 결국 해냈다는 걸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달라진 나를 보고 그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반신반의하며 응원했던 사람들도 단주와 다이어트에 성공한 날 보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그보다 내가 단주 생활을 이어가도록 하는 동력은 하루하루 달라지는 내 몸의 변화와 일상에 대한 만족감 때문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의 인간관계는 앞으로 무척이나 달라질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하겠지만 더 건강하고 의미 있는 관계로 맺어질 인연을 기대한다. 우선 우리 부부의 생활이 달라졌다. 매일같이 함께 술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는데 요즘은 아침 산책을 같이 하는 것으로 시작해 외식 대신 집에서 건강한 식단으로 식사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20년 넘게 부부로 함께 살면서 이런 생활은 처음이다. 남편도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점점 건강해지는 것 같다며 나의 변화, 우리의 달라진 일상을 반기고 있다.


연말이면 아무것도 한 일 없이 한 해가 저물어간다면 투덜댔다. 나이만 한 살 더 먹는다며 거울 앞에 서서 늘어난 주름살을 세어보고 뒤룩뒤룩 찐 살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스스로 단주를 결심하고 실천해가면서 올해 마지막날의 내 모습을 기대하게 되었다. 50대에 더 멋지고 당당한 모습으로 꿈을 향해 힘차게 걸어갈, 내년의 나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미 달라지기 시작했다. 과거의 내가 아니다.

이전 07화단주 성공 비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