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는 별책
오래전 지인의 추천으로 연금술사(The Alchemist)를 읽게 됐어요. 동화 같으면서 영감을 주는 내용에 보석 같은 어록이 군데군데 박혀있었죠.
The secret of happiness is to see all the marvels of the world, and never to forget the drops of oil on the spoon.
When you want something, all the universe conspires in helping you to achieve it.
문장들에 매료되어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의 거의 모든 책을 사서 읽는데요. 어릴 적 잡지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에 실린 연재만화를 잊지 않고 줄줄이 읽던 것처럼 파울로의 소설을 연재처럼 탐독했어요. 포르투갈어를 영어로 번역한 번역본이었는데 번역자가 연금술을 썼는지 파울로가 언어의 연금술사인지는 모르겠어요. 어휘와 문장이 친숙하고 까다롭지 않아 좋은 작품을 편안한 문장으로 읽는 기분이었어요. 번역본이지만 한 작가의 여러 책을 집중적으로 읽었기에 narrow reading을 한 셈인데요. 언어 습득면에서 얼마의 보탬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소설 읽기에 자신감이 붙은 건 확실했어요.
Narrow reading을 하다 보면 머지않아 다양한 작가와 관심 주제로 확장하게 되는데요. 조만간 자유 리딩(Free Voluntary Reading)이 가능해지죠.
* Free Voluntary Reading
수준에 맞는
관심 가는 책을 골라
사전을 잊고
문법도 잊고
시간도 잊고
나 자신도 잊고
스토리에 빠져들어
다독하는 것
읽는 즐거움이 목적인 free voluntary reading은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낯선 사람처럼 낯선 단어는 추측해 가며 스토리와 메시지 파악에 치중해요. 소설이면 소설, 그 언어를 분석 없이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즐겁게 많이 할 수 있다는 건 무의식적이고 효율적으로 언어가 습득된다는 말인데요. 어릴 적 만화를 읽듯 좋아하는 책을 실컷 읽으면 돼요.
의무보다 자유
단어와 문법을 따로 연습하고 주어진 토막글을 사전에 의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번역하고 문제를 푸는, 과거 우리의 학습 방법과는 상반되는 접근인데요. 이런 학습 방법은, 내가 선택한 책 한 권을 통째로 시간 날 때마다 하는 읽기를 결코 따라잡지 못한답니다. 자유 리딩은 단어, 문법, 이해도, 읽기 속도, 쓰기, 모든 면에서 더 향상된 결과를 가져온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요. 말하기와 쓰기를 통해서는 기대할 수 없는 수확이기도 하지요.
자유 리딩은 나이나 성향에 따라 만화책, 잡지, 신문 도 포함할 수 있어요. 미국 언어학자 스티븐 (Stephen Krashen)은 초등 3학년 때 읽기에서 뒤처졌다고 해요. 이를 걱정한 아버지가 만화책을 몇 년간 원 없이 사줬고 덕분에 좋아하는 만화를 실컷 읽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읽기에 재미를 붙였고 학교에서도 읽기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는 흐뭇한 회상을 해요.
논픽션보다 픽션
여기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장르는 논픽션보다 대개 픽션인데요. 픽션이라면 로맨스, 미스터리, 탐정, 소설, 희곡, 고전부터 동시대 문학까지 선택지가 광대하죠. 픽션을 읽으면서 학교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토익 같은) 영어를 어떻게 익힐 수 있겠느냐 하는 의문이 나와요. 학과 공부나 전문 분야를 위해 필요한 영어 습득은 그 분야의 책들을 직접 골라서 깊게 파고드는 수밖에 없는데요 (narrow reading). 픽션은 생각보다 어휘나 표현, 난이도에서 광범위해요(역사, 과학, 미술, 음악, 경제 등의 분야를 커버할 정도로). 그에 비하면 논픽션인 자기 계발서나 칼럼, 기사, 전문 서적등은 언어 자체보다 내용 전달이 목적이기 때문에 평이하고 단조로운 언어를 고용하는데요. 그래서 일단 전문용어에 익숙해지면 읽기는 쉬운데 지루하지요. 결론적으로 픽션 리딩은 커리어에 필요한 영어 능력에 토대가 되고 자체로 충분한 준비가 됩니다.
그럼 자유롭게 원하는 작품을 골라 볼까요? 헤밍웨이, 카프카, 까뮈, 톨스토이, 플로베르, 제인 오스틴.. 욘 포세, 아니 에르노, 하루키.. 읽고 싶은 저자의 책은 끝이 없고 저자는 비영어권인 경우가 허다하죠. 선택한 책을 읽으면서 영어도 익히는 방법은 영어 번역본으로 읽는 것인데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물론 한국어로 읽어야 하겠죠. 나머지 책들은 한국어보다는 어원이나 문장구조나 정서에서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영역본으로 마음이 끌리는데요. 읽다가 그만두는 경우도 있고 그래도 끝까지 읽고 싶으면 한역본을 구해 보기도 하는데요. 영어 번역으로 읽으면 좋은 점이 있어요. 번역 노동자의 수고가 엮인 만큼 일이 더 수월해지는 게 아닐까 해요.
* 번역본 장점
듣도 보도 못한 단어가 비교적 적다.
문장 패턴에 변수가 적다.
번역자는 폭넓은 독자층을 겨냥해, 될 수 있으면 평이하고 대중적인 언어로 옮기려 한다.(이건 추정)
이것은 영어 원작을 읽으며 경험한 것인데요. 영어 원작자 중에는 꾸꿈스러운 (흔하게 보기 어려울 정도로 후미지고 으슥한) 어휘를 일상으로 쓰고 문장을 컴머나 대시(—)도 없이 길게 늘어뜨려 우리 같은 외국인 독자를 난감하게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이유인지 문학성 있는 훌륭한 번역가가 작가 이상으로 인기를 누리는 경우도 종종 있고요.
이런 글을 쓰다 보면 고3 때 고전문학 선생님이 떠올라요. 선생님은 열과 성을 다해 아래아한글 활용을 설명하시지만 학생 누구 하나 질문을 하거나 다시 설명해 달라고 손을 들지 않았거든요. 아름다운 우리 고문에 파고들지 못하고 겉핧기식으로 날려버린 그 시간들이 이제야 안타까울 뿐인데요. 차리리 간단한 테스트라도 하셨더라면 그리고 함께 대화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영역본으로 본 책 중 기억에 남는 페이지를 찾아 두 작품 여기에 옮겨봅니다.
1.
It struck midnight. The village, as usual, was silent, and Charles, lying awake, was still thinking of her. Rodolphe, who had been wandering the wood all day, by way of distraction, was sleeping peacefully in his chateau; and Leon, far away, was asleep. There was one other who, at that hour, was not sleeping..
2.
That was the only thing Levin noticed and, without thinking who it might be, he glanced absentmindedly into the coach. Inside the coach an old lady dozed in the corner and a young girl, apparently just awakened, sat by the window, holding the ribbons of her white bonnet with both hands. Bright and thoughtful, all filled with a graceful and complex inner life to which Levin was a stranger, she looked through him at the glowing sunrise.
퀴즈예요! 두 작품의 제목을 댓글에 남겨주세요. 힌트는 위에 언급한 작가들 중에 있고 사람이름이 제목입니다. (*-^)
* Reading Tip
첫 번째 글은 컴머가 너무 많은데 빼면 흐트러지고 가만 두자니 걸려 넘어진다. 컴머는 의미 단위 나눔으로 끊을 때 끊고 붙일 때 붙이라는 중요한 신호이다.
독해는 끊기의 기술이다. 주어가 어디까지인지 알면 부수적인 현재/과거분사, 부사절, 관계절을 추리고 주어와 짝이 되는 본동사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참고 논문
Fact or Fiction? The plot thickens.
Self-Selected Fiction: The Path to Academic Success?
Free Voluntary Reading: New Research, Applications, and Controversies
All by Stephen Krash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