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검 Jun 11. 2022

오랑 그랑

알베르 까뮈 페스트

몸을 관통한 페스트가 마치 지병을 씻어낸 듯 그는 새롭게 태어났다. 쓰지 못할 것 같던 편지를 쓰고 저녁 글쓰기도 다시 시작했다. '그랑'은 이제 행복했다.


이것이 페스트가 휩쓸고 간 도시에서 생긴 일이라면 페스트란 정말 예측 불가하다. 긴 잠에 빠진 도시를 깨우고 힘들지만 아닌 척 살아가던 한 시민을 '부활'하게 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페스트였다. 하지만 제목처럼 페스트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결국 패배했으니까. 그럼 무엇이 승리하였나?  


닥터 리외가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본 조세 그랑은 인간적이면서 조금 신비한 구석이 있었다. 알제리의 오랑 시청에서 일하는 그는 언뜻 보기엔 평범한 하급 공무원에 지나지 않았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항상 헐렁한 옷을 입었고 빠진 윗니를 드러낸 채 웃곤 했다. 퇴근 후엔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우던 라틴어를 다시 공부했다. 라틴어가 프랑스어 단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들 했기 때문이다.


아내 '잔'과는 십 대인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신혼이 지나고는 생계를 이어가는 지친 일상 탓인지 사랑하는 일을 잊고 살았다. 갈수록 말이 없는 남편, 고요한 부부의 식탁, 잔은 지쳐갔고 그렇게 수년을 버티다 결국 그를 떠나 버렸다. 그때 그녀에게 편지를 써서 내 마음을 알렸더라면.. 이번엔 그랑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해 줄 말을 알았더라면.. 하지만 스스로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랑은 성실한 사람이다. 적은 수입에 맞는 소박한 생활을 하고 보이지 않는 어떤 이상이나 신념을 좇지 않았다. 받아들임의 자세로 분수에 맞게 자신의 위엄을 지키려 했다. 자아를 삭제한 듯 주장이나 불평 없이 자신의 업무를 하는 직장인이었다. 페스트로 오랑에 사망자가 늘어나자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사태를 헤쳐나가는데 기꺼이 힘을 모았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멋진 이야기를 써서 책으로 내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그의 저녁 루틴은 이 숙제를 하는 일로 채워졌다. '나를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의 입에 붙은 호소이다. 머릿속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그려줄 단어 하나를 찾는데 몇 날밤, 몇 주를 고민하고 어떤 땐 멍한 상태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나를 표현한다는 건 마치 나를 찾는 과정인 듯 그랑에겐 너무나 어렵다. 그것을 가능하게 할 단어를 고르는 일이란.. 이런 집착이 일종의 문자 페스트에 걸린 듯해서 수많은 환자 치료로 녹초가 된 닥터 리외보다 오히려 더 피곤해지곤 했다.


불현듯 찾아온 전염병으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고 도시는 고립된다. 고요한 밤은 도시의 울음을 틀어막고 도시는 그래도 뭔가 희미하게 중얼거린다. 리외는 그랑의 숨죽인 목소리도 들으려 한다. "오월의 어느 화창한 아침, 한 우아한 여인이 멋진 밤색 말을 타고 불로뉴 숲의 꽃 가로수 길을 지나갔다." 문장을 완벽하게 만들어 줄 형용사를 고르고 또 골랐다. 문장의 톤이 문장을 cliche처럼 들리게 하는 것 같았다. 이 멋진 서문 후 안타깝게도 독자는 다음 문장을 읽을 수 없다.


그런 그도 결국 페스트에 걸리고 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러자 뭔가 달라졌다. 갇힌 감옥에서 풀려나온 듯 그를 옥죄던 강박에서 해방되었다. 잔에게 편지를 썼고 문장에서 형용사를 빼기로 한다. 늦었지만 그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꾸밈없는 단순한 문장으로 글도 쉽게 쓰이리라. 50이 넘은 나이, 이제 내려놓았으니 스스로에게 너그럽고 더는 속으로 울지 않는 씩씩한 오랑의 시민이 되리라. 그랑은 이렇게 자신만의 자유와 행복을 찾았다.

 

페스트는 나레이터인 닥터 리외와 그의 친구 타루의 기록이다. 그 결과 194–년  알제리의 오랑에서 발발한 페스트와 오랑인의 불운은 픽션이지만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도 길게 이어지리라. 다만 그랑의 글쓰기는 스케일이 달랐다. 작고 무의미해 보여서, 용기가 필요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묻고 있는 것 같아서 나에게는 누구보다 생생한 캐릭터로 다가왔다. 결국 그가 이겼다.


무엇이 승리했냐는 앞서 질문에 답한다면, 그냥 나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생업을 이어 나가고 그렇게 평생 해오던 일로 위기 상황에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일과 후에는 나만의 루틴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루지 못할지언정 나만의 꿈을 간직하고 끊임없이 묻고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닫힌 도시에서 고립과 헤어짐, 사랑하는 이를 잃는 슬픔을 겪으며 오랑 사람들은 변해갔다. 더 이상 선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받아들여질 뿐이다. 페스트가 그들의 판단을 마비시킨 것이다. 그들에겐 돌아갈 과거나 꿈꿀 미래가 없다. 지금 여기가 있을 뿐이다. 지금 여기를 거부하는 건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저항 없는 받아들임이 어쩌면 평온을 가져왔다.


어디선가 실려와 향기로 도시를 떠돌다 시들어 버릴 장미의 계절이 올 것이다. 회색 먼지가 휩쓰는 뜨거운 태양 아래 새 출발을 다짐할 것이다. 이제 오랑은 예전의 오랑이 아니다. 잊는다 해도 모든 것을 잊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페스트가 남기고 간 상처는 영원할 테니까. 그 상처를 안고 새롭게 태어날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리듬에 실려오는 감정이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