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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검 Jun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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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

Portrait of César  

1956 Karel Appel  

Ulster Museum Belfast, Northern Ireland  


인생은 방랑이다. 자유와 행복을 찾아서 떠나는 여정이다. 와인빛 검은 바다를 밤새 날아 낯선 도시로 왔다. 나고 자란 집을 떠나 태평양 너머 남쪽 땅에 살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유년의 기억은 선연한데 어릴 적 떠나온 고향땅에 다시 가보기도 전에 바다 건너 외국에 왔다. 자유의 공기를 마시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고정관념으로부터 사회의 기대치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해방감이었다. 타국어를 익히고 낯선 날씨와 관습에 기꺼이 익숙해졌다. 연꽃열매를 먹고 기억과 감정이 느슨해져 집에 돌아가는 걸 잊은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처럼 향수로 시름하지 않았다. 시련이라고 이름 붙이기는 거창하지만 독립이민이란 걸 이루었을 땐 세상에 나와 나도 독립된 성인이 됐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결정이었고 어느덧 일상이 된 이민생활에서 돌아가 다시 정착할 수 없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고국이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나는 나를 찾아가는 중일까.


오디세우스는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왔다. 안개에 싸인 고향을 못 알아보고 다시 낯선 곳에 왔다며 서럽게 목놓아 운다. 그곳은 안개가 아니라도 그의 늙고 지친 심신처럼 변해온 세월을 담고 있으리라. 가파르지만 신의 축복으로 비옥한 고향땅에 닿기까지 어떠한 사연들이 있었을까. 우리 모두는 동화 같은 삶을 원한다.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고 믿으며 역경을 이겨내고 나이 들고 늙어서야 순한 죽음을 맞으며 세상과 작별하고 싶다. 트로이 전쟁을 노래한 일리아드의 저자 호머가 귀환하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따라가는 이야기가 오디세이이다. 고대 그리스 음유시인 호머는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동화 같은 이야기로 또 하나의 대서사시 오디세이를 이루어냈다.


교활한 오디세우스, 음모를 꾸미는 오디세우스는 멀티 페르소나이다. 충동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틈날 때마다 사람을 시험하려 들고 필요에 따라 (여신 아테나의 도움으로) 변장을 하고 다양한 거짓 자서전을 창조한다. 그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는 베테랑 군인처럼 변덕스럽고 말이 없다가 갑작스런 공격성을 보이는가 하면 눈물을 참지 못한다. 그의 기질과 능력은 영웅이 되고도 남을 만큼 차고 넘친다. 끊임없는 자기 재창조, 웅변술, 리더십, 적응력, 강인함, 인내력과 생존력으로 상상 이상의 고난과 위기를 극복하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는 또한 슬픈 남자였고 한 여자만을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을 지녔으며 드라마틱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름 없이 떠돌며 아무도 아니었다가 때에 따라 아무나가 되기도 한다. 도대체 그는 누구이고 몇 개인가. 자신도 헷갈리는 자신을 찾아 헤매다 길을 잃고 표류한 건 아닌지.


님프 요정 칼립소가 제안하는 불로영생의 유혹을 물리치고 아내 페넬로페에게 돌아온 오디세우스의 의리와 사랑을 생각했다. 그는 중세의 로맨틱한 기사가 아니다. 고대 도시국가 이타카의 왕이었다. 그는 야심 있는 인물이다. 난파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오지 않을 섬에서 복종하는 존재로 님프와 함께 불멸하겠는가, 고향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왕으로 살며 만천하를 통치하다 죽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는가. 불멸을 거부함으로써 불멸하고자 했던 오디세우스. 필멸자가 되기로 한 오디세우스의 선택은 헥토르나 아킬레우스의 선택과 유사한데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남성성과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행위였다. 우리라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 오디세이는 권력과 영속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탐구할 수 있게 해 주는 텍스트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 영웅의 개념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 달랐을까. 주인공인 그를 영웅으로 믿고 싶지만 그의 언행은 반영웅에 가깝다. 그는 7년 간 칼립소와 불륜을 했고 바다 해적처럼 침략과 약탈을 일삼았으며 신분을 위장하고 그의 궁궐에 모인 불청객들과 행실이 좋지 않은 노예들을 몰살했다. 철저한 계획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들의 부도덕함은 처벌받아 마땅하지만 복수가 살인으로 치달은 건 극적 효과를 가져온 걸 제외하고는 그리 납득할만한 처사가 못된다. 그들은 트로이인이 아닌 그의 사람들, 아직 회개할 여지가 많은 이타카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감행한 정당방위로 인정할 수 있는가.


철없어 보이던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에서 전사하기 전 인간성을 회복하고 성군의 면모를 보여준 반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사람들을 속이고 살아남아 왕좌를 탈환한 오디세우스에 대해서는 후세에도 말이 많았다. 그리스 로마 문학에서 그는 비극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아내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죽인 벌로 이타카에서 추방되었다는 후문이나 마녀 써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텔레고노스가 찾아와 그를 독살했다는 전설 같은 것이다. 트로이 왕자 아이네이아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Aeneid)는 일리아드 영웅 오디세우스를 잔인하고 파렴치한 파괴자로 묘사한다. (다른 시대, 다른 저자, 다른 번역이 동일 인물에 대한 이렇게나 큰 해석의 간극을 만들 수 있다.) 추락한 이미지의 오디세우스와 상반되는 인물이 아이네이아스이다. 필사적으로 귀향하려 했던 오디세우스와는 반대로 그는 고향 트로이를 떠나 미래의 안식처를 찾아 헤매었고 결국 로마 건설이라는 역사를 쓰게 되었다.


악인들을 제거하고 권좌에 올라 내 세상을 만들어도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는 것은 그 만이 아는 그의 과거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해한 죄악, 잃어버린 부하들과 눈물, 그가 흘린 눈물들이다. 과오와 수치심과 회한은 그가 지구를 떠나 하데스의 지하세계로 입장하는 그날까지 함께 할 것이기에. 그는 더 이상 한 곳에 정착해 살아갈 수 없다.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완수해야 할 힘든 일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여러 도시를 여행해야 한다. 그래야 편안한 노년을 맞고 편히 눈 감을 수 있다고 지하세계에서 만난 예언자의 혼이 일러 주었다. 그 방랑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어디론가 떠나기를 갈망한다. 나를 잊고 내 현재와 과거를 잊고 어디론가 떠나가고자 한다. 바다를 모르고 소금을 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으며 한 번도 배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닿을 때까지. 방랑의 연속이 삶의 목적인 양.


돼지지기 유메이어스는 돼지똥이 쌓인 그의 오두막에서 거지 방랑객도 환대하는 귀족적인 인간미를 지녔다. 어릴 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오기 전에는 그 자신 에게해에 있는 시로스 섬의 왕자였다고 한다. 황제의 딸을 사랑한 어느 가난한 왕자가 궁궐에 들어가기 위해 돼지지기가 됐다는 안데르센의 동화와도 같은 이야기이다. 평생을 남의 집살이를 하며 늙어버린 왕자는 도망이나 귀향을 시도하지 않았고 이타카를 영원한 안식처로 삼으며 영영 귀향하지 않을 것 같은 주인 오디세우스를 그리워한다. 노예라는 신분에 이런 드물고 고귀한 면모를 불어넣어 준 호머의 인본주의에 적지 않은 감동이 일었다.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서양문학에서 정절의 표본이 된다.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의 처 김씨 부인이 지아비를 기다리다 망부석이 됐다는 설화를 연상케 했다. 구혼자들이 득실거리는 궁궐에서 시아버지의 수의를 짰다 풀었다를 3년 동안 반복했던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무려 20년 동안 재혼에 대한 압박을 이겨냈다. 부부는 떨어져 있어도 닮아가는지 그녀는 틈날 때마다 울었지만 남편 못지않은 지략가이기도 했다. 속이는 남편과 잘 믿지 않는 아내. 신중한 페넬로페는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단번에 믿지 않고 두 번이나 시험한다. 오디세우스 왕가에 해피엔딩을 안겨준 것은 그녀의 변치 않는 일편단심이었다. 남편의 명예와 통제력은 아내의 정절에 따라 180도 판도가 달라질 수 있었다.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정절에 대해서 호머가 얼마나 많은 지면을 투자했는지를 보며 결혼제도에 대한 시대관을 엿볼 수 있었고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를 잊지 않은 부부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Odysseus and Penelope by 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 1802  (private collection)


둘이 보낸 시간은 둘 만이 안다. 그 기억은 영원하다. 그래서 사랑은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프 둘 만의 비밀, 그들만의 토큰, 올리브 나무 침대. 그가 손수 지은 그들의 침대는 기둥을 올리브 나무로 지어 땅 밑으로 뿌리가 깊고 아름다운 잎들이 하늘로 향해 있다. 그것은 영원한 사랑 속에 변화하는 부부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다. 작품에서 가장 로맨틱하고 오디세우스가 재발견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잔인하지만 눈물 많고 교활하지만 이해심 많은(적어도 페넬로페에게는) 오디세우스에 경외심을 갖는지도 모른다.


낯선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무슨 일인가 빼꼼히 내다본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가 요구하지 않은 용무로 내 집 앞에 서있을 땐 집안으로 초대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문전박대하듯 발길을 되돌리게 하는 행위가 좋은 관습인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누군가 내 집을 찾아왔다는 건 뭔가 일신할 때라는 징조 같기에. 사람들을 초대하면 일단 치우고 청소부터 한다. 그렇게 마음이 동하는 것부터가 내 생활에 새 바람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건 좋고 긍정적인 에너지일 것이다.


호머의 시대에는 거지행색의 떠돌이 방문객이라도 환영하고 정중하게 대접했다. 신이 모든 것을 지켜본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위험을 무릅쓰고 의무감으로 행하는 관습이기도 했다. 핵심은 강자가 약자에게도 대가 없이 공평하게 베푼다는 룰이다. 주인뿐 아니라 방문객도 그에 따르는 예를 지키지 않으면 앞으로의 여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알아야 했다. 오디세이의 서사는 인물들의 방문에서 시작해서 방문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기를 채워주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객의 사연을 물으며 선물과 떠날 여비까지 보태주는 왕국이 있었고 처음에는 다 해 주고도 뭔가 잘못돼서 두 번째 찾아가니 신의 저주를 받은 자라며 내쫓는 왕이 있는가 하면 오도 가도 못하게 붙드는 님프가 있었고 굶주린 방문객을 잡아먹는 거인들의 섬과 외눈박이 식인 괴물이 양을 치며 사는 동굴도 있었다. 한편 오디세우스는 식인 괴물 폴리페무스의 동굴에 무단침입해 음식을 훔침으로써 방문객의 룰을 깼고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에 도착해서는 굶주린 그의 선원들이 신성한 소를 잡아먹고 제우스의 저주를 받아 죽음을 당했다.


오래전 겨울. 밖에서 떨고 있는 이웃을 내 방에 초대한 적이 있다. 열쇠를 집 안에 두고 나와 밖에 갇힌 그를 우리 하우스메이트가 귀가하며 보고 내게 귀띔했다. 말을 터본 적이 없는 사이였지만 나는 선뜻 그를 초대했고 난로 옆에 자리를 내주었다. 마실 것이나 먹거리를 제공한 것도 아니고 잠깐 쉬어 가게 했을 뿐인데 이 작은 친절은 내게 큰 보상이 되어 돌아왔다. 그 후 우린 서서히 친해졌고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나는 그의 눈에서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영혼의 창을 보았다. 그는 아마 신이 내 방으로 보내준 천사였으리라. 처음부터 그는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릴 때 집에서 같은 방을 쓰며 함께 컸던 언니가 내 집에 휴가를 보내러 온 적이 있었다. 꿈에 그리던 재회의 기쁨도 잠시 우린 떨어져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달라진 서로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부딪히며 소원함과 서운함을 함께 감당해야 했다. 나중에야 누구의 잘잘못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떨어져 살다 어느 날 갑자기 한집에 머물며 거리가 일도 없어져 생겨난 해프닝 정도로 여기게 됐다. 가족이나 친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레슨을 그때의 쓰라린? 경험으로 배웠다. 무엇보다 내 집에 온 손님을 대하는 자세는 내가 사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면서도 고대국가의 관습처럼 나보다 더 크고 확장된 나를 발휘하는 배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환대(hospitality)는 구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도 소홀히 하면 십중팔구 호머식 인과응보를 맛보게 될지니.


오디세이는 결말 부분이 모호하다. 이타카인들과 오디세우스의 전쟁이 여신 아테나의 중재로 멈출 뿐 확실한 엔딩 없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24권으로 이야기는 모두 끝이 났지만 오디세우스의 그 후 신변에 대한 수많은 전설이 생겨난 이유이다. 일리아드의 결말은 어땠을까. 6년 전 방영된 tvN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작가는 뭘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뭘 안 쓰느냐도 중요한 능력이라고 했다. 일리아드는 분노로 시작해서 분노가 결국에는 인간성에 패배한다는 주제로 끝이 난다며 이야기를 더 진전시키지 않고 거기서 끝낸다는 것은 작가에게 진짜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일리아드의 결말에 같은 작가로서 만족한다는 얘기였다. 아킬레우스의 죽음이나 트로이 목마의 일화를 기대했던 나 같은 독자에겐 한풀 꺾이는 결말이었다. 이 사건들은 오디세이 전반부에 짤막하게 언급된다. 오디세이도 마지막 24권이 내겐 마뜩잖다. 아테나와 제우스, 두 신들의 일방통보로 싸움은 잠정 중단되고 서사시는 막을 내린다. 이러한 결말은 신들까지 비호하는 오디세우스의 위대함을 극적이고 문학적으로 보여준다는 해석이 있긴 하다. 호머는 대서사시 모음 중 두 편을 장식하고 열린 결말로써 후편을 예고하는 듯하다. 오디세이 에필로그는 그 후 2세기가 지나서야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고노스를 노래한 서사시 텔레고니로 전해진다.


오디세우스는 고난과 시련을 딛고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되찾았다.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자아를 만났으리라. 그걸로 그의 존재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전쟁의 비참함도 승리의 영광도 불멸이라는 유혹과의 투쟁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는 다시 떠날 채비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 와인빛 검은 미지의 바다로 또다시 노 저을 것이다.


머리에 서리 맺히고 침식된 절벽처럼 주름 패인 노인이 홀연히 귀향할 것이다. 나는 노인을 위로할 적당한 말을 찾다가 신형철의 문장을 떠올려 보았다. “의미란 무의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싸움 그 자체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임을. 그러므로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는 것임을..”


언제나 꿈을 꿈다. 회귀본능이라고들 한다. 나는 과연 이 긴 방랑을 마치고 귀향할 수 있을까. 결국은 돌아가기 위해 이토록 길고 외로운 여행을 하고 있던 걸까. 변화는 언제나 쉽지 않고 필요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삶이 순식간이고 무기력해질 때 나는 다시 질문하고 나의 여정을 이어가야겠다. 누구나 나만의 오디세이가 있다. 오늘도 기꺼이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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