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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검 Aug 10. 2023

그림처럼 남아 주기를


귀갓길이 아름답다고 마음에 새긴 건 처음이다.

낯익은 가로수들이 지나가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부쩍 커 보여서.

하루 일을 잘 마쳐서.

아닌 것 같다.

반복 재생해서 들어도 설레는 (전거)탄풍() 멜로디가 흘러나와서.

내 작은 도요타로 한아름 들어오는 저녁노을이 그림 같아서.                                                        

그런 것 같다.

노을을 보자고 두시 반 퇴근을 여섯 시까지 늦춘 건 아니지만 차를 몰며 감상하는 노을은 깜짝 선물 같았다.

노을이 일상이고 일상이 여유라서 오는 안도감인지도 모르겠다.




일을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위해 아껴뒀는데 사랑인 줄 모르고 지나쳐버린 것들이 나중에 찾아와 묻고 반항했다.

그래서 일도 사랑하게 되었다.

매일 가는 여행에 비유해 보았다.

오늘은 단출하게 세명의 레이디와의 동행이었다.

우리 반은 기초반인데 오늘은 몇 명이 결석을 했다.

2 1 2, 2 2 4, 2 3 6 …

파투마가 구구단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교실 문이 열리고 와르다가 들어섰다.

작은 체구를 이불처럼 덮은 검은색 패딩과 흰 무명천 히잡을 쓴 그녀는 지각을 곰살맞은 미소로 뭉글리며 자리에 앉더니 파투마의 구구단에 가세했다.

2단부터 9단까지 단독으로 들어주려 했는데 덜꺽 끼어드니 나는 갑자기 ‘쉬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빵 터졌다. 파투마의 첫 웃음이.

아 이제다 싶었다. 항상 침울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었다.

누구나 맡겨진 제 몫을 사는 건 힘에 부치나 보다.

구구단은 차차 외우기로 하고 곱셈문제로 들어갔다.

시에라리온 출신 아미나타는 처음 해보는 것 같았다.

그 나라는 불온하기 짝이 없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는 아프리카 서해 그곳은 젊은 숙녀에게 어떻게 기억됐을까.

영어시간에 셈하는 건 나도 낯설다.

어릴 적 산수를 더듬어 단계별로 설명한 후 문제를 내주고 들여다보았다.

 번에는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해하면 기초반이 아닐 터.

와르다는 곱셈을 곧잘 풀었는데 쉬는 시간이 끝나자 스낵을 먹기 시작했다.

말괄량이 여고생 같아서 주의를 주자 봉지를 가방에 쓸어 담는다. 눈치는 기본이다.

놀라운 일이 하나 더 생겼다.

한번 더 설명해 주니 아미나타가 세 자리나 되는 곱셈 문제를 다 맞힌 것이다.

와르다와 함께 했냐고 두 번 묻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녀가 빙긋 웃었다.

오후엔 스펠링을 연습하고 스펠링 테스트를 하기로 했다.

정신을 가다듬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스펠링 명상이다.

와르다의 손가락에 끼워진 화려하고 길쭘한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소말리아에서 온 거냐고 물으니 여기에서 샀다고 했다. 비눗물이 닿으면 변색한다고 했다.  

파투나와 아미나타는 차분하게 써 나갔다.

와르다는 어질러놓은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들이 데리러 와서 밖에서 기다린단다.

정신을 떼어놓은 듯 와르다의 마음은 이미 교실에 없었다.

스펠링이 날아다녔다.

나에게도 그런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추억을 뭐라고 할까 Memory 말고.

그림을 뭐라고 할까 Picture 말고.


귀갓길이 아름다운 건.  

오늘이 한 편의 그림 같아서.

집에 닿으면 멀어지는 추억이 되어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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