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이 보통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추신: 어쩌면 보내는 사람은 보통 이하일 수 있음
전 평범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평범 이하일 수도 있겠네요. 제 곁에 계신 분들 역시 세상에 이름을 드높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분들 역시 평범 이하일 수도 있는데 보통사람들은 이분들을 치매 노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분들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통과한 사람들이 분명하지만 유명했던 적도 역사에 기록된 적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이 전하는 이야기들은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요, 아쉽게도 이분들은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분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했을 때 강제 징용되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나라의 독립을 외치는 태극기가 사방에 휘날릴 때 그중의 한 사람이었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북쪽이나 남쪽의 이름 없는 병사였습니다. 대동강 철교가 부서졌을 때 철제 구조물 위를 위태롭게 건넜던 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강원도 삼마치 고개에서는 피란민을 향해 미군이 벌였던 일을 목격했던 한 사람이었고 부산까지 내려간 피난길에서 '개판 오 분 전'이란 외침에 큰 솥을 향해 달려가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이분들입니다.
가난할 수밖에 없던 시절에 배곯아가며 자식들을 키워냈고 그 자녀들이 최루탄에 쫓겨 문을 두드리면 니 자식, 내 자식 가리지 않고 품 속에 안았던 사람들, 가장 빨리 새벽을 깨웠고 가장 늦게 별을 보며 집으로 향했던 사람들, 이유도 모른 채 나라가 망했을 때 주저 없이 장롱 속의 금붙이를 내어 놓던 사람들, 제 곁에 있는 치매 노인들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데, 어떤 역사책 속에도 이름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온 이분들의 직업 또한 다양한데요, 군인, 의사, 공무원, 회사원, 선생님, 농부 등 우리가 알 만한 직업은 물론이고 외환 암거래 상인을 칭하는 '달러 아줌마'라든지 돈을 빌려주고 하루하루 이자를 받는 일수꾼, 동화책에 나오는 나무꾼, 화전민 같은 쉽게 접하지 못하는 직업을 가졌던 분들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다양한 삶을 살았던 분들인데, 이분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제 생각입니다. 그건 이분들이 인생을 허투루 살아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분들을 그렇게 이끌었던 걸까요.
저는 자주 치매 노인분들의 손을 잡습니다. 고운 손을 찾기가 어려워요. 굳은살에 휘어진 손가락, 손톱이 빠져 있거나 관절 마디가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희고 긴 손가락을 가진 제 손이 부끄러웠습니다. 전 여태 허투루 살아온 시간이 많았거든요.
저는 이분들이야 말로 역사를 만들어온 장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이나 큰 기업의 총수가 역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고 이름도 남지 않을 사람들이, 하루하루 힘을 다하는 것으로 삶을 채워온 이분들이 세상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라고요. 작은 빗방울이 모여 냇물을 만들고 강물로 모여 바다로 흐르듯이요,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의 걸음이야말로 진짜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요양원에 학생들이 봉사를 옵니다. 청소를 하거나 어르신들 말벗을 해드리는 일인데요, 아이들과 대화를 해보면 요즘 아이들은 제가 자라던 때와 다르게 많이 성숙한 것 같았습니다. 중학교 아이들도 벌써 어떤 대학, 학과를 선택할지 계획이 있었어요.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제 중학교 시절과 너무 비교가 돼서요. 그때의 저는 무계획이 계획이었으니요.
아이들은 학교 공부 외에도 학원을 다니고 의무적으로 봉사를 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하루를 보내고 있었어요. '대단하다'라고 말해주었지요. 중학생들이 이 정도니 고등학생, 대학생, 취업준비생은 또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N포 세대라는 말을 얼마 전 들었습니다. 인생 선배로서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제가 이런 현상을 만드는데 기여했다거나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느 정도의 책임감도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힘들다는 결혼을 하면 집 문제, 아이 양육, 불안정한 직업이 기다리고 있을 테죠. 그러고는 얼마 안 가서 임금 피크제라든지 조기 퇴직이 닥칠 수 있으니, 요양원에 계신 분들이 살아낸 과거보다 요즘 젊은이들의 삶이 더 힘든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국민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니까요.
그럼에도 말입니다. 저는 평범한 이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가 대신 영어시험을 치러주지 않아도요, 미국 국적을 취득해서 군대 면제를 받지 않는다 해도요, 소송이라도 해볼 부모님의 유산이 없다고 해도요,
저는 보통사람인 당신들이 작은 빗방울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로는 무엇도 적실 수 없지만 다 함께 대지를 적시는 비처럼, 평범한 그대들이 살아가는 오늘이 이 사회의 오늘이라고요.
드러나지 않고 눈에 띠지 않지만 그대들의 걸음이 진짜 역사라고요.
후일에 평범한 당신들이 바로 역사가 될 것이라고요.
그러니 오늘,
보통 사람인 당신은 무조건 행복하셔야 합니다.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