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의 시골마을에서 일 년쯤 기거한 적이 있다. 양평 시내에서 한 시간 정도 산을 향해 차를 몰아야 도착하는 곳이다. 폐교를 임대해서 캠핑장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학교 앞쪽으로 논 몇 개를 지나면 넓은 하천이 나오고 학교 뒤쪽에는 낮은 산이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폐교 결정 후 학교에 아이들이 사라지자 아이들의 놀이기구는 철거되었다.
이곳이 학교라는 것을 알아차릴 어떤 것도 남지 않았는데 학교가 생기기도 전부터 이곳을 지켰을 것 같은 키 큰 은행나무는 유독 눈에 띄었다. 동네 노인은 은행나무를 보며 자랐다고 했다.
은행나무는 한 그루만 있어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노란 손수건을 가지마다 묶은 수컷 은행나무가 멀리에서라도 보여야 암컷 나무가 잉태한다는 것이다.
함께 하루를 보내지 못해도 멀리 부산에서 전해지는 소식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나와 은행나무는 다르지 않다. 나는 암컷이 아니지만 암컷 나무와 같고 그녀는 수컷 은행나무를 닮았다. 그녀는 부산에서 노랗게 익은 잎사귀를 흔드는데, 나는 멀리서도 그녀의 신호를 느낀다.
크기와 수령만큼이나 은행나무는 수많은 열매를 만들었고 때가 되면 땅바닥에 그것들을 뿌렸는데 셀 수 없는 숫자였고 아담과 이브, 단 두 사람이 생산해 낸 사람들보다 많아 보였다.
벌레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독으로 몸을 감싼 은행의 소출들이 노란 잎과 섞여 썩기 시작하면 공기 중에 노란색 알갱이가 떠다니는 것 같았고 그 공기를 마시는 사람들도 노랗게 물들었다.
나는 은행 열매를 큰 고무통 가득 담고 냇가로 가서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치대었다. 그러면 뿌연 노란색 물감이 흐르는 물살에 섞였고 물고기들은 티셔츠에 그려진 그림처럼 황금빛을 띠며 꼬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물컹거리고 고약한 냄새가 나던 겉옷을 벗은 은행 열매는 럭비공 모양의 하얗고 딱딱한 껍질을 드러냈다. 이 껍질까지 부수어야 은행이 드러날 것이었다. 한꺼번에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터여서 나는 하얀 열매를 넓게 펴서 햇볕에 잘 말린 다음 20Kg짜리 쌀 포대에 넣어두었는데 두 포대 가득이었다.
나는 겨울밤 잠이 오지 않을 때나 간단하게 맥주를 마실 때 은행을 구웠다. 그때마다 은행 껍질을 일일이 깨뜨리기가 쉽지 않았다. 빈 우유팩에 은행을 넣고 전자레인지에서 가열하는 방법을 배운 후에는 은행 껍질 까는 일이 다소 편해졌지만 은행 열매를 주울 당시의 생각처럼 자주 먹지는 못했다. 은행 열매 대부분은 쌀 포대 속에서 겨울을 났다.
봄이 되어서 창고를 정리하던 나는 겨우내 잊고 지내던 은행 열매를 발견했다. 하얀색의 열매껍질에는 검은곰팡이가 생겨있었다. 욕심을 부려 다 먹지도 못 할 많은 열매를 주운 거였다.
흐르는 물에 씻겨 내려가는 무른 겉껍질은 어렵지 않게 벗겨냈다. 하지만 안쪽에 단단한 껍질을 깨고 은행을 먹기 위해서는 매일의 수고가 필요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어떤 경우는 스쳐 지나는 생각일 테고 어떤 경우에는 생각을 끈질기게 붙잡아야 할 때가 있다. 고약한 냄새를 풍겨서 멈추고 싶고 한 꺼풀 벗겨낸 생각에 딱딱한 껍질이 있어 일일이 깨뜨려야 할 때면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쓰기를 멈추고 글감이었을 생각을 창고에 넣어두고 그러고는 잊어버렸다.
봄이 되어 우연찮게 다시 생각을 떠올렸을 때는 처음의 하얀 색깔을 찾을 수 없거나 곰팡이가 피어 못쓰게 된 후였다.
글쓰기는 은행 알을 까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매일 조금씩 깨뜨리지 않으면 머릿속의 글감들은 단단한 껍질 속의 노란 알을 내어놓지 않는다.
하루 열 개의 은행은 우리 몸의 독소를 배출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글쓰기는 우리 정신의 독소를 배출하는데 도움이 된다.
글쓰기와 은행 껍질 깨뜨리기는 다르지 않다.
너무 많이 까지는 말자.
하루 열 개면, 하루 십 분이면 충분하다.
꾸준히만 한다면.
(커버 사진: HeungSoon, pixab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