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공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재욱 Dec 27. 2019

한 끗 차이

산다는 건

[한 끗 차이](콩트)

일어나라~ 따라라랑~
사각형의 검은 화면 속에서 새벽을 깨우는 함성이 시작되었다.

한 여자가 하얀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개기일식처럼 둥글고 넓게 펼쳐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침대 모서리를 더듬거렸다.

그녀가 겨우 휴대폰을 잡고 목을 비틀어보지만 이미 새벽은 시작된 였다.

힘겹게 몸을 뒤집은 그녀는 목을 뒤로 젖히며 붉은 꽃 장식이 화려한 천장을 쳐다봤다.

그녀의 머릿속에 지난밤 회식자리가 떠올랐다.

그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
미스 정은 입사 이래로 남자 직원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예쁜 얼굴에 날씬한 몸매를 가졌고 일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넘쳤는데 거기에 걸맞게 높은 콧대를 겸비한 그녀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입사 이래로 쭉,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젠장맞을, 망할, 솔로 상태였다.
어느덧 미스 정은 골드 미스라고 불리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깟 세월에 꺾일 그녀가 아니었고 당당한 걸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언감생심, 요즘에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일어났다.
그 일은, 스스로 발끝을 볼 수도 없는 배를 하고는 잘 자라다가 태풍에 꺾인 은행나무처럼, 반 토막 키를 자랑하는 김 대리가 연신 그녀에게 들이대는 일이었다. 

사람이야 착하고 성실한 것이 그만하면 되었다 싶고 그녀보다 열 살이나 어리다는 흐뭇한 점도 있었지만 미스 정의 높기만 한 콧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미스 정은 부푼 배만큼이나 끈질긴 김 대리의 구애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다. 

지난밤 회식에서는 옆에 찰싹 붙어서 지긋한 미소로 끈적거렸던 김 대리였다.
그런 김 대리가 아침부터 천정에 그려진 붉은 꽃 속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자 미스 정은 긴 머리카락을 상모 삼아 돌리고 또 돌렸던 것이다.

과음의 후유증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던 그녀의 출근길 발걸음이 바빠졌다. 

회사 입구에 다다르자 빙글거리는 회전문이 서두르라는 듯이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문제의 자리 몽땅, 배불뚝이, 질긴 가죽 김 대리가 반갑게 손을 흔드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어이구 저 화상!'
그녀는 못 본 체 고개를 돌리고 껄떡거리는 회전문 속으로 급하게 몸을 밀어 넣었다. 

그녀를 따라 누군가 급하게 회전문 안으로 들어왔다.
'김 대리인가?'
잔뜩 인상을 쓰고 돌아본 그녀 뒤에는 여직원들 사이에서 단연 인기 많은 김 과장이 서 있었다.

빛나고 정다운 미소는 그녀를 위로하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김 과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훤칠한 키에 서구적인 얼굴,
거기다 매너 좋기로 소문난 데다가 회장님 손자라는 타이틀을 자랑하는, 아! 바로 미스 정의 이상형이었다.
그녀가 배시시 입꼬리를 올리며 돌아서는데 뒤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 대리가 미스 정이 차지한 회전문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미처 입성하지 못하고 투명한 유리 너머에서 씩씩대고 있었다. 

그 순간에 잘 돌아가던 회전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미스 정은 놀란 얼굴로 김 과장을 쳐다봤지만 사실 속내는 웬 횡재거니 하는 마음이었다. 

김 과장은 금세 내린 커피 같은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나머지 회전문의 칸은 다행스럽게도 모두 비었다.

미스 정의 입가에 연신 미소가 피어올랐다.
경비복을 입은 사람 몇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미스 정의 뱃속이 폭풍 속의 바다처럼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꾸륵- 꾸륵-

어제의 과음이 불러온 반응이었다.
꼴 보기 싫은 김대리 때문에 연거푸 마신 술이 문제였다.
미스 정의 예쁜 엉덩이가 폼페이 최후의 날에 성난 베수비오 화산처럼 가스를 분출하기 시작했다.
뿌뿡- 뿡- 뿡뿡-
처음에는 살짝 웃던 김 과장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유황냄새가 진하게 피어나기 시작하자 그는 화산 폭발의 징조가 가까웠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그녀를 피해 슬금슬금 구석으로 옮겨갔다.
급기야 김 과장은 온몸을 유리에 바짝 밀착시킨 채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벌게져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눈앞에 자리 몽땅, 배불뚝이, 질긴 가죽 김 대리가 떡 하니 서있었다.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눈빛이 간절했다.
서로에게 원하는 바는 달랐지만.


'살... 려... 줘...'

그녀는 입모양 만으로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 대리는 눈만 껌뻑거렸다.
'문... 열... 어... 바... 보... 멍... 충... 아...'

그녀는 더 큰 입모양으로 말없이 소리쳤다.
여전히 눈만 끔뻑이는 김대리였다.
미스 정은 두 다리를 배배 꼬며 한 손으로는 화산 분화구를 틀어막고 다른 한 손으로 입에 반쪽의 나팔을 만들어 붙이고 김 대리를 노려봤다.
'소... 원... 들... 어... 줄... 게... 흡!'

김 대리가 성난 멧돼지처럼 회전문을 향해 돌진했다.
꽝-
유리 문이 흔들렸다. 유리와 부딪친 김 대리가 뒤로 튕겨서 넘어졌다.
벌떡 일어난 김 대리는 두 손바닥에 침을 뱉고 다시 럭비 선수처럼 어깨를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회전문을 향해 다시 뛰어들었다.
꽝-
그 덕분에 회전문이 조금 돌아가며 빌딩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틈이 생겼다.

그녀는 그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몇 번 꿈틀거리던 그녀의 몸이 회전문 바깥으로 빠져나가며 바닥에 쓰러졌다.
경비복을 입은 남자 서너 명이 그녀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미스 정은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화산 가스를 뿜으며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과장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넘어졌던 김 대리가 벌떡 일어나서 주먹을 쥔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


"저기, 저..."

김 대리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서 말하라고.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래, 네 소원 들어주마. 순전히 내가 손해 보는 장사지만, 사람 됨됨이는 괜찮은 걸로 위안해야지.'
미스 정은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한참 뜸을 들이던 김 대리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되어 주십시오!

오랫동안 미스 정을 눈여겨봤습니다.

저희 아버지, 이십 년 전에 사별하시고 지금껏 홀로 지내고 계십니다.

바로 미스 정이 제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아버지의... "

말 문이 턱 하고 막힌 미스 정이었다. 

그녀의 눈 아래살들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네놈이 아니라...
네놈의 아버지라고...
이런 코끼리 신발 같은...'

다음 날부터 미스 정과 김 대리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소원 들어준 담 서요~."
"미스 정~"
"어머니~"
"엄마~"


"아 - 아악."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미스 정의 빛나는 검은 머리가 소용돌이쳤다.
그녀는 매일 남사당 바우덕이로 변신했다.

-끝.


※바우덕이: 19세기 중반에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었던 여성 꼭두쇠. 


* 극적인 재미를 위해 외모에 대한 표현을 했으나 외모를 비하할 의도는 1도 없음을 밝힙니다.


(커버 사진: WikiImages,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매일 밤 들려오는 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