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긴 연설이 시작된 때는 새벽이었다. 딸을 혼내는 것 같았다. 따님은 고개를 숙인 채 두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였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할머니 한 분이 조용히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남편이 외박을 했는데 너는 어찌 이리 태평이냐?"
할머니의 언성이 높아졌는데 따님은 말이 없었다.
"초장에 버릇을 고쳐 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냐?"
할머니는 딸에게 소리를 친 후 조금 떨어져 있던 다른 할머니를 쳐다봤다.
"사돈도 그러는 게 아니에요. 아들이 바람피우는 걸 아셨으면 따끔하게 한 마디를 해서 말려야죠. 어찌 모른 척할 수 있어요?"
대화를 들어보니 한쪽 구석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분은 할머니의 사돈인 것 같았다. 할머니의 사돈 역시 눈만 끔뻑거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세 사람 중에 할머니만 핏대를 올리고 있었다.
할머니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참 고우세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팔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이니 젊었을 때는 더욱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머니는 남편에게 쫓겨났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는 돈 한 푼 없이 알몸으로 쫓겨났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사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 중매결혼을 했는데 남편 역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작은 건설회사의 사장이었다. 사람들은 선남선녀가 만났다며 두 사람을 부러워했다. 남편 사이에서 그녀는 아들 하나와 쌍둥이 두 딸을 낳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녀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의 회사에 새로운 경리가 들어왔는데 그녀보다 더 예쁜 여자였다. 그녀는 새로운 경리가 자신보다 더 예뻤다고 강조했다. 그녀의 말처럼 남편은 그녀보다 더 예쁜 여자에게 푹 빠져버렸다. 가정적이던 남편은 회사적으로 변했다. 얼마 후에 그녀는 집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돈도 없이 알몸으로 나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행히 그녀는 친정집 도움을 받아 음식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바람난 남편에게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던 그녀는 밤낮을 쉬지 않고 일했다. 가게는 무난하게 자리 잡았고 지점을 낼 정도로 성장했다. 그녀의 고운 얼굴도 한몫했을 것이었다.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었다. 그때, 함께 일하던 조카가 그녀의 전 재산을 빼돌린 후 행방을 감췄다. 사람을 잘 믿는 그녀가 조카에게 모든 돈 관리를 맡긴 것이 화근이었다. 그녀는 다시 알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들은 군대 제대를 며칠 앞두고 사망했고 쌍둥이 두 딸 중 언니가 원인모를 병으로 죽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막내뿐이었다. 막내딸이 결혼했을 때 그녀는 하나 남은 딸만은 행복하기를 빌었다. 그녀의 하루는 막내딸 걱정으로 시작해서 막내딸 걱정으로 끝났다.
여기까지가 내가 들은 그녀의 사연이었다. 더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는데 그녀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치매 환자였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 뒤죽박죽인 상태로, 특히 그녀는 불면과 섬망(망상) 증상을 자주 보였다.
나는 할머니에게 혼나고 있던 딸과 눈이 마주쳤다. 따님이 나를 보고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사실, 할머니의 딸 역할을 하고 있던 사람은 나와 함께 밤 근무를 하던 요양보호사였다. 그 옆 복도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미소를 보냈다. 그분 역시 요양원에서 지내는 치매 환자였다.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할머니의 시선이 새롭게 등장한 나에게로 향했다.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할머니에게 넙죽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는 검지 손가락을 세워 나를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왔구먼. 자네, 정말 이럴 텐가? 다른 건 몰라도 바람피우는 건 안된다고 했지. 그래. 그 여자가 우리 애보다 이쁘던가? 더 예뻤어?"
"......"
나는 바람피운 남자가 되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가 연출한 막장드라마는 곧 막을 내렸다. 아침이 어김없이 왔고 해가 떠오르자 힘 빠진 할머니는 그제야 잠들었다. 자욱한 안개가 사라진 것도 그때쯤이었다.
할머니의 드라마가 아주 끝난 것은 아닐 것이다. 막내딸에 대한 걱정은 계속될 것이고 막장드라마는 그리 쉽게 끝나지 않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