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인물이 훤하구먼."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가끔 듣는 말이다.
"아이 눈부셔. 킥킥!"
스쳐 지나던 여고생들이 나를 보고 손바닥을 눈썹에 붙인다. (누군가의 눈에 눈부신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멋진 일이던가.)
여하튼 갈수록 영토를 확장하는 내 이마 때문에 눈썹이 한참 아래로 도망간 느낌이다. 거기다가 양쪽 구석을 파고든 탈모는 내 이마를 M자로 만들었다.
머리를 감는데 배수구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다. 아! 무슨 병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머리 빠지는 데에 좋다는 샴푸는 종류별로 다 써봤다. 요즘은 차인표 씨가 선전한 것을 쓰는데, 설명서에는 '효과는 개인별로 차이가 있다'는 문구가 있다.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욕실 바닥에 여전히 물이 고인다. 손바닥으로 수챗구멍을 훑어주어야만 물이 빠진다. 새로 산 샴푸는 아직 한 박스가 남았다. 그놈의 딩동 소리,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쇼호스트의 다급한 목소리, 긴박한 효과음, 빌어먹을 홈쇼핑!
한동안은 앞머리를 길러서 이마를 덮고 다녔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얇고 머리숱이 많지 않다 보니 이게 또 우스꽝스러운 거다. 앞머리는 마치 납작하게 이마에 붙은 상추 같았다. 혹은 깻잎이든지.
분노의 5단계란 정의가 있다. 이런 것을 연구해서 가지런하게 내어놓는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 (존경스럽다.) 그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란다. DABDA 모델이라고도 한단다.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 내용을 왜 꺼냈냐 하면 내 경우가 이미 수용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1. 아! 왜? 자꾸 이마가 넓어지는 거야. 아닐 거야.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대머리라니!!
2. 아, 짜증! 거울만 보면 화가 나네. 이거.
3.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래 샴푸를 바꿔보자.
4. 역시 소용이 없잖아. 아! 내 나이 50도 안돼서 벌써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5.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해. 어쩔 수 없잖아. 이리 타고난 걸 말이야. 그래. 차라리 훤하게 까고 다니자!!
이상이 내가 탈모를 받아들인 과정이다.
나는 내 이마를 인정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대답할 수 없다.
꼭 글이 대단한 주제를 지녀야 하는가?
혹시 탈모로 고민 중인 몇 분이 라이킷을 눌러준다면 그걸로 되었다. 서로 위로가 된 거니까.
(누군가 '당신 이마가 아주 넓어서 오히려 보기 좋습니다'라고 말해주시길, 부디 말이다. 뭐 딱히 나쁘지 않은 것도 같다. 흠흠! 그렇다고 라이킷을 누른 모두를 탈모자로 간주할 이유는 없다.)
홈쇼핑에서 윤기 차르륵거리며(비슷한 효과음이 나온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자랑한다.
쇼호스트가 이런저런 연구 결과가 적힌 판때기를 보여준다.
아래쪽 구석에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따르르릉~ 헛, 전화가 폭주한다고 한다.
먹는 탈모약이다. 심지어 5개월 무이자다. 아! 아!
난 이미 내 이마를 인정했는데, 생긴 대로 살자고 다짐했는데, 안되는데.........
카톡 알림이 온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커버 사진 pixabay, PeterKraayvan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