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엄마는 이혼 후에 혼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는 나를 데리고 녀석의 엄마 집을 방문했다. 그곳의 현관에는 잎사귀 없는 장대 몇 개가 담장 위로 솟아 있었고 그 끝에는 색색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좁은 마당을 지나 방 두 개가 보였다. 하나는 엄마의 침실이고 또 하나는 신을 모신 곳이라고 녀석이 말했다.
친구 엄마는 하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할아버지 모습의 동상 앞에 앉아있었는데, 그 동상은 하늘거리는 천이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큰 할아버지 형상 앞에는 그보다 작은 신상들이 네다섯 개 놓여있었다. 신상들 뒤로 배경이 되는 벽 전체를 채운 그림에는 수십 개의 얼굴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머리 뒤쪽으로 둥근 원이 걸려있었다.
그녀는 아주 진하게 화장을 한 상태였다. 나는 어릴 때 색동저고리를 입고 굿하는 무속인을 본 일이 있었는데, 친구의 엄마는 흰색 투피스 차림이었다. 그녀가 하얀 얼굴로 우리를 반기며 자리에 앉으라고 재촉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직업을 숨기지 않고 당당한 목소리로 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물어왔다. 얼떨결에 나는 순순히 내 개인정보를 그녀에게 제공했다. 그곳에 개인정보 동의서는 없었다. 곧 그녀는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는 펭수의 언어일 것만 같은 글들을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글자를 휘갈기며 그녀가 한 마디씩 던졌고 나는 말을 더해가며 답했다.
- 물가에 살았구먼.
- 앗! 네. 남해라는 섬에서 자랐어요.
-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어.
- 앗앗! 네네. 제가 좀 고생을 하긴 했어요.
- 부모 중에 한쪽 복이 없네. 없어.
- 앗았앗! 네네네. 맞아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다가 순식간에 외계어로 종이를 가득 채운 그녀가 내게 소리쳤다.
- 너는 교회에 나가야 한다. 그래야 살아.
나는 꼬맹이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던 터였다. 자주는 아니고 교회에서 무슨 선물을 준다든지 예쁜 여학생이 등장했다는 소식이 들린다든지 하면 그때는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다.
- 저 교회 다녀요.
내 대답에 그녀의 긴 속눈썹이 흔들렸다. 새하얀 얼굴 때문에 길고 검은 붙임 눈썹의 움직임이 더 선명했다. 잠시 멈칫하던 그녀가 목소리 톤을 더 낮추어 말했다.
- 너는 하나님을 믿어야 해. 그래야 살아.
그녀의 말로는 내가 귀신을 몰고 다닌다는 거다. 그런데 그런 일이 내게 해를 끼치기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을 다치게 할 거라고 했다. 호기심에 시작한 일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보다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그렇게 한참 귀신 이야기로 나를 겁주던 그녀는 짜장면과 군만두를 배달시켜서 우리를 배불리 먹이고 대문 밖에까지 나와 배웅을 했다. 그녀는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 꼭 교회에 다녀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말했다.
- 사실 우리 엄마는 진짜 무당이 아닌 것 같아. 그 방에 모셔둔 할아버지 봤지? 야, 그게 단군이란다. 말이 되냐. 왜 단군 할아버지가 거기서 나오냐고. 크크. 내가 봤을 때는 대강 때려 맞추는 것 같아. 그러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웃고 넘겨라.
녀석에겐 그런 미신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큰소리쳤지만 그날 밤에 자꾸만 친구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심지어 나는 악몽까지 꾸었는데, 꿈속에는 내가 그동안 들었고 공포영화에서나 보았던 모든 귀신과 살인자들이 몽땅 등장해서 내게로 달려들었다. 심지어 13일의 금요일에 등장하는 제이슨 부히스는 실감 나게 하키 마스크를 쓴 채였다.
다음 일요일이 되었을 때 나는 교회에 나갔다. 꼭 그녀의 말 때문은 아니라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야,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말이다.
내 악몽은 사라졌을까. 그럴 리가. 무서운 이야기를 듣거나 공포영화를 본 날엔 어김없이 그들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자주 꿈속에서 끝없이 달려야 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것들이 내 삶에 끼어들 때가 있다. 그런 일은주변 사람들로부터 시작될 때도 있고 친구 엄마처럼 생뚱맞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일들에필요 이상의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덫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순식간에 주객이 전도되어 그들이 감독이 되고 나는 그들의배우로 전락한다. 주연도 아닌 제이슨의 마체테에 죽어가는 엑스트라처럼.
우리 인생극장의 감독은 바로 우리다. 주연이 될지 조연이 될지 혹은 지나가는 사람으로 사라질지는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다. 감독, 주연, 조연, 단역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배역을 넘나들며 극을 완성해야 하는 사람이 우리 자신이라는 걸 기억하자.
내 시선에 의해 세상의 가치와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을, 천국과 지옥이 내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삶의 감독 자리를 노리는 타인들이 나를 유혹한다. 편하게 감독 자리를 내려놓고 그들의 배우가 되라고.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말고 그들이 연출하는 데로 따라오라고 말이다. 그럴 때 나는 내 인생극장의 감독으로서 주저 없이 그들을 캐스팅한다. 너는 가로수 1, 너는첫 등장에 죽는 시체 2, 그리고 너는 캐스팅 탈락!
그런데 정말로 친구 엄마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말썽꾸러기 둘을 교회에 보내면 조금 착해질 거라고 생각하신 걸까. 아쉽게도 우리는 전혀 착해지지도, 귀신을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우리 둘의 좌충우돌 학교생활은 그 뒤로도 쭈욱 계속되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교회에 다닌일은 무척 잘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