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7년, 요양보호사 자격을 획득하고 일한 시간이다. 횟수로는 8년 차. 수백 명어르신들에관한 기억은 일일이 다 떠오르지 않는다. 몇몇 강렬한 기억만이 끝없이 과거를 소환한다. 그분들이 앓는 병처럼 잊히지 않는 과거가 선명하다.
나는 오늘 요양보호사로써 마지막 밤을 맞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비가 내리고 풀벌레 소리는 빗소리에 묻혔다. 생각보다 슬프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쁠 일도 아니다.
치매 어르신들께는 퇴사 소식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몸이 아파 며칠 쉰다고만 에둘러 말씀드렸다. 치매가 아닌 다리나 고관절 골절로 인해 요양원에 오신 할머니께서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셨다.
- 자네가 있어서 그나마 내가 이곳에서 견뎠는데 이제 어쩌누?
나는 뻥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어쨌거나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의도였지만 할머니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나의 사라짐이 별일 없는 요양원에서 별일 없는 일이 되기만 바랄 뿐.
2013년 8월 1일에 시작한 요양보호사 일이다. 한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를 이 길로 이끌었다. 이후로 백여 명의 어르신들을 떠나보냈고 나는 백여 번의 후회를 했다. 이별 후에 갖는 참회가 무슨 소용이던가. 나는 과연 잘해온 걸까? 아닌 것 같다. 그분들의 마지막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매번 반성을 해야 했으니까.
죽음은 자주 급박하게 닥쳤고 늘 아련했고 항상 슬펐다. 나는 천국을 믿는 그리스도인인데, 천국 가는 그분들 뒤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분들의 마지막 날에 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만다.
어느 날부터 어르신들의 기억을 쓰기 시작했다. 그분들이 남긴 메시지를 사람들에게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적은 글들이 한 편집장의 눈에 들었다. 출간제의를 받았고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떠난 어르신들이 내게 주신 선물이었다. 난 더욱 열심히 남은 어르신들을 보살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일 뿐이었다.
치매 어르신들의 과거를 듣고 그들이 살아온 삶의 길을 들여다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대변을 손으로 만지는 어르신의 마음속에서 과거에 유달리 깔끔을 떨던 새색시의 손길을 보았다. 이불이며 옷가지를 쟁여두는 할머니의 기억은 세 아이들 먹여 살리던 포목점의 새벽 시간이 스며있었다. 전쟁을 떠올리는 할아버지의 눈빛에는 열여덟 살 젊은이가 감당했을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이 드러났다. 요양원에서 죽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던 한 할아버지의 기억에는 어릴 때 전해 들었던 아버지의 객사 소식이 있었고 밤마다 보따리를 유품으로 남기던 어떤 할머니의 소원에는 뼈아픈 가난이 숨어있었다. 세상이 볼 때 비정상적인 치매 어르신들의 모습은 병으로 인한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분들을 격력하고 인정하고 사랑을 드리는 일, 요양원에서는 그런 일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일하며 느낀 점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확실한 한 가지는 이것인데, 다친 마음을 치료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꼭 연인 사이의 그것을 말한 건 아니다. 그럴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맞은데 또 때리는 경향이 다분하다. 사람에게 상처 받은 이가 사람으로 치유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이 준 상처는 사람으로 고쳐진다는 걸 부인할 수도 없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누추해 보이는 이들을 돕는 일이야 말로 바로 그런 일이 아닐까 한다. 한 순간에 자신의 삶이 바닥으로 추락한 자가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살폈다. 치매 어르신들은 아홉 가지 기억을 내어주고 남은 한 가지 기억을 목숨처럼 붙잡고 되뇌었다. 마치 그 나머지 기억을 붙잡고 삶을 사는것처럼.
나는 매일 그분들의 기억과 마주했다. 그것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기억들은 내게로 흘러와서 곧 부서졌지만 끝없는 과거의 물결은 한 줄의 문장이나 단어로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어느새 나는 그분들을 닮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들의 냄새가 내게서도 피어올랐다. 치아가 하나도 없어서 알아듣기 힘든 노인의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고 말을 잊은 할머니 몸의 언어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드디어 눈으로 그분들의 체온까지 재는 허준 선생의 경지에 올랐던 것일까. 그럴리는 없다. 정작 자신의 몸 상태에는 깜깜했으니까.
내 몸이 이렇게 망가져 있었음을 몰랐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어르신들을 옮겨드렸다. 침대에서 휠체어로, 휠체어에서변기로, 다시 침대로, 다시 휠체어로..... 누구보다 열심이었기에 누구보다 빨리 부서지고 있었다. 몸이라는 것이.
언제부턴가 왼쪽 팔이 저려왔다. 물리치료를 받으면 조금 나아졌다. 얼마 지나면 다시 아픈 악순환이 이어졌다. 한쪽 팔이 아프자 다른 쪽 팔을 많이 사용했고 그러자 양쪽 팔이 저려서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MRI를 찍었다. 목디스크.
마스크 위쪽으로 붉게 상기된 두 눈만 보이는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 이 상태로 일을 했어요?
- 네.
그가 재차 물었다.
- 많이 아팠을 텐데?
- 참을만했어요.
나는 그의 하얀 가운에 묻은 누런 얼룩이 계속 눈에 거슬렸다.
그가 말했다.
- 당장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하면 시술이나 수술이 불가피해요. 다행히 약물과 견인(장비를 이용해서 목을 위쪽으로 쭉 당기는 거였다.)으로 좋아질 것도 같은데, 일단 치료하면서 경과를 봅시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 일하면서는 안될까요?
그가말했다.
- 안돼요.
그는 6주 진단을 내렸다. 거기에 추가 치료가 필요할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회사원은 많이 아프면 병가 신청을할 것이고 대개는 허락될 것이다. 아닌가?
암튼 내가 일하는 요양원에서는 한 달 동안의 병가에 난색을 표했다. 그리 오래는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게 평소에 나대지 말고 얌전히 시키는 거나 하고 있어야 했다는 생각이 아주 짧은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거부하는 사람, 할머니, 할아버지의 욕구를 먼저 살피는 사람, 대강대강 일을 하지 않는 사람, 그렇다. 이곳에서 나는 그들에게 프로 불편러였다.
FM을 고집하는 프로 불편러를 떠나보내기에 딱 좋은 구실이 생긴 것일까. 이제라도 AM으로 바꿔야 하나.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FM은 가장 나다운 나의 주파수니까.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결국 치료를 위해 사직서를 썼다. 일하다 아프면 떠나야 하는 시스템에 조금은 서운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느낀 것은 반드시 안 좋은 일 뒤에는 좋은 일이 온다는 거다. 다만 그때가 나의 시간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문제라면 문제인데, 이마저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결국 될 일은 될 테니 말이다.
어쩌면 크리스마스이브날 걸려온 출간 제의 전화처럼 이 또한 하나님의 선물일 수도 있겠다. 한 달쯤 푹 쉬라는.
벌써 새벽 한 시를 조금 넘겼다. 아침에 퇴근을 하면 이곳으로의 출근은 끝이다. 공식적으로는 삼일의 연차가 남아있는데, 그건 서류 상일뿐이다.
어르신들은 모두 잠들어 계신다. 침실 하나하나를 둘러본다. 남은 직원들이 잘 보살펴드리겠지.
어르신들께 작별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그분들을 슬프게 할 필요는 없다고 되뇐다. 운이 좋다면 며칠 만에 나를 잊을 수도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한 일주일쯤은 기억해주시기를..... 그리고 혹여 마지막 때가 되었을 때 편하게 떠나시기를 전심으로 기도한다.
저는 한 달 치료와 휴식을 병행하며 그동안 왕창 밀린 책을 잔뜩 읽을 예정입니다. 막 설레는 중입니다. 글도 마구 쓸 것입니다. 짧은 여행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러고는 몇 달 후에 개원하는 대규모 요양원에 지원할 예정이에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규모의 요양원이니 이런저런 업무가 좀 더 세심하고 체계적이길 바라고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근데, 일단 합격을 해야겠죠...... 으쌰 으쌰.
아침 마당, 화요초대석 출연은 8월 25일로 확정되었습니다. 방송이니 또 뭔가 바뀔 수도 있지만요. 본방 사수!
이렇게 요양원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갑니다. 곧 휴식 시간이 끝날 것 같습니다.
다시 요양원에서의 첫 밤을 기대하며 이만 정리해야겠어요. 치료도 잘 받아서 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