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 주의보가 내린 오늘, 집 앞 키 큰 소나무가 위태하게 휘청거린다. 잔 가지 몇 개 꺾였지만 나무는 부러지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적당히 흔들려야 한다. 그래야 부러지지 않겠지. 소나무도, 사람도.
누군가 서정주 선생께 물었다.
"글 잘 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서정주 선생은 말했다.
"그거....... 차츰 알게 되지. 허허허......"
첫 책을 출간하고 출판사에서는 다음 책 출간을 제안했다. 이미 원고 내용은 머릿속에 있었고 두 번째 책이니 술술 글이 나오겠지, 누군가는 출간이 꿈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참 운이 좋은 모양이야, 슬슬 쓰지 뭐,라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첫 문장부터 마음속에서 검열이 시작됐다. 작가라는 자의 첫 문장이 이 따위라니. 애써 첫 비평가를 무시하고 다음 문장을 이어가면 어김없이 또 다른 날 선 평론가가 등장했다.
'도대체 이 정도 수준의 문장으로 출간이라니 가당키나 해?'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자체 검열은 심해졌다.
문장을 더 잘라야지, 조사와 어미가 부적절한데, 주어가 빠졌잖아, 여기저기 쓸데없는 피동형은 뭐지, 묘사를 위한 묘사는 필요 없잖아, 이 문단은 완벽하지 않은데....... 결국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원죄를 타고난다는데, 나는 태초의 죄에 작가이면서 글을 쓰지 못하는 죄책을 더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 나는 글을 멀리하고 작가로서 할 일을 못 하고 있는데, 글은 살아서 꿈틀거렸다. 한동안 열어보지도 않던 브런치에 구독자가 한 분 두 분 늘었고, 인스타 등에는 내 책에 관한 리뷰가 계속 올라왔다. 나는 리뷰에 댓글도 달지 못하고 그저 '좋아요'만 눌렀는데(이 마저도 가슴 떨렸으니), 가끔 나의 소심한 흔적을 좇아 블로그나 인스타 계정을 팔로워 하는 독자분들이 생길 때는 쓰지 못하는 나를 욕하며 혼자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리디북스]에서는 곧 내 책,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를 원작으로 제작 중인 웹툰이 발표될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글은 남을 것 같다. 내가 쓴, 혹은 나를 선택한 글에게 영광을!
영하 18도, 겨울바람이 옷깃을 세우게 하던 밤 11시에, 영등포 고가 아래에 집이라고 할 수 없는 집을 짓고 잠을 자는 사람이 있다. 바닥에 스티로폼 단열재를 깔고, 삼양 라면이라는 글씨가 보이는 종이박스로 낮은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무슨 태권도라고 쓴 긴 현수막, 중간이 찢어져서 무슨 의원이지 가늠이 안 되는 의원 당선을 축하하는 플랫카드 따위로 지붕을 삼은 집, 그곳에 한 남자가 누워있다.
밖으로 드러난 피부가 아플 정도로 추운 날에 그는 죽으려고 이곳에 누웠을까. 아님 그럼에도 살고 싶어서 저리 종이 벽을 만들고 있는 걸까.
그에게 햄버거를 건네는 목사님, "많이 춥지요?"
그가 햄버거를 받아 들고 아직 따듯한 빵을 품속에 넣는다. 사내는 말이 없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모습, 언제 머리를 감았는지 여기저기 떡진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얼굴을 숙이고 한동안 꿈적도 하지 않는다. 국방색 무늬의 아래위가 붙은 한 벌 옷을 입었는데, 그 위로 군데군데 곰팡이 같은 얼룩이 묻은 누런 패딩을 껴입었다.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가 고개를 든다. 몇 분이 흘러서야 그의 얼굴을 본다.
그런데, 그런데, 그의 눈이 너무 맑다. 술에 찌들어 노랗게 물든 눈동자를 기대했던가. 세상을 등지고 급기야 스스로를 버린 패배자의 멍한 눈빛을 바랐던 걸까. 남자의 눈은 그의 것이 아닌 듯했다.
그가 품었던 햄버거를 꺼낸다. "먹어도 될까요?"
시간이 지나면 얼어버릴 빵, 네! 어서 빨리 드세요.
남자는 펀드매니저였다고 했다. 한 달에 수천만 원을 버는 일은 시쳇(時體) 말로 일도 아니었단다. 그는 왜 거리로 나왔을까? 나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기 때문인데,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서 말을 하고 싶지만, 이런 류의 답은 딱히 정해지지도 않았을뿐더러 듣기에 따라서 정답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 때문에 굳이 말할 수가 없다, 랄까.
다만 우리는 그가 얼어 죽을 것이 걱정되었는데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얼어 죽지 말라며 구청에서 침낭을 나눠주고 굶어 죽지 말라고 교회에서 밥을 주니, 이 생활도 할만합니다. 그래도 옛날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서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주로 잠을 자려고 노력하죠." 사내는 짧은 몇 마디로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재빠르게 정리했다. "보증이라고...... 아파트를 날리고, 그걸 갚아보겠다고 사채까지 써가며 주식을 무리하게 했죠. 결국 내가 사라지는 게 남은 사람들이 사는 거더라고요. 어쨌든 애들하고 마누라는 살아갈 테니까......."
우리는 그의 남은 밤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돌아왔다. 밤새 바람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나는 그의 맑은 눈동자를 떠올렸는데, 다음날 아침 그는 평소처럼 태연하게 아침 급식소에 나타났다.
아직 거세다. 바람이,
불면 흔들려야지. 바람이 그칠 때까지 흔들리는 건 약해서가 아니다.
바람을 견디는 방법일 테지. 하지만 뿌리는 땅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꼭,
흔들리고 흔들려도 새 순이 돋아날 것이다.
가끔 십 년 전, 길 위의 시간을 생각한다. 그때의 나는 흔들리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허리를 숙이고 두 주먹을 가슴에 붙이고 한 다리를 뒤로 빼서 바람을 버텼다.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다. 뿌리가 없는 줄도 모르고.
결국 두 동강이 났다. 흔들리는 데도 요령이 필요한 법. 바람이 불면 잘 흔들려야 한다.
사람마다 바람을 버티기 위한자신만의 뿌리가 있겠지. 가족 혹은 사랑하는 사람, 책이거나 좋아하는일 등.
글을 쓰며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단 한 문장을 쓰기 위해 고민하던 나는 내 뿌리가 글이겠구나, 생각한다.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하면서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구나'라고 써보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다시 쓴다. 흔들리면서도 쓰기로 한다. 바람은끝없이 불어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