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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욱 Oct 12. 2021

송아지 같은

1. 송아지 같은     



 하늘까지 솟은 빌딩에 긁힌 태양이 서쪽 하늘에 진한 자국을 남기고 사라질 때, 영등포역 건너편 뒷골목에는 통유리로 안이 훤한 단층 건물에 붉은 등이 내걸립니다. 유리창 안에는 하얀 허벅지를 드러낸 젊은 여자들이 긴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이때, 건물 뒤편의 크고 높은 쇼핑몰 벽면에 가지런히 달린 조명이 눈을 부라리듯 매서운 빛을 골목으로 쏟아냅니다. 그러면 골목길이 대낮처럼 밝아지고, 너른 유리창 앞에 내건 붉은 등은 한낮의 종이 연등처럼 제빛을 잃습니다.

 젊고 어린 아가씨들이 있는 골목을 빠져나와 8차선 도로를 건너면, 중년이나 간혹 노년이라고 불러도 충분할 여자들이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서 지나는 사내들에게 자신의 몸값을 흥정합니다. 건너편 골목의 반의반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합니다. 이런 일은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골목 입구에는 ‘청소년 통행금지구역’이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습니다. 

 영등포구청은 2020년 11월에 발표한 ‘도시정비계획안’을 토대로 집창촌과 쪽방촌 재개발에 착수하였습니다.      

 

 십여 년 전 영등포역에는 끊임없이 구급차 소리가 들렸고, 제 몸만 한 낡은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이 쉼 없이 밀려왔습니다. 백화점 고객들과 길 위를 맴도는 사람들이 섞인 그곳에서 어둠과 빛은 완전히 별개였는데,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그들은 애초부터 서로를 볼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 쪽방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걷기에도 비좁은 골목이 실핏줄처럼 펼쳐진 곳, 쪽방촌에는 좁은 방을 차지한 사람들과 월세를 받는 건물 주인들과 길 위를 떠도는 이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그곳에는 교회와 천주교와 불교가 각자의 신들을 모시고 이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쪽방촌으로 모여드는 사람은 늘어만 갔습니다.

 노숙인들은 무료급식을 하는 종교단체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큰 가방과 종이상자를 들고 다녔는데, 가방에는 자선단체에서 나눠준 옷가지며 먹다 남은 빵이 들었고, 종이상자는 이불이 되고 벽을 만들며 지붕이 되어 줄 것이었습니다. 가끔 가족사진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술자리에서 지난 일을 떠벌이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허풍일 때가 많았고 그들은 오히려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려고 노력했습니다. 

 길거리 생활에 이력이 날수록 상자 집도 발전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에 든 종이상자의 양이 늘었습니다.      


 노숙인들은 낮에는 고가도로 아래에서 해를 피하고 밤에는 역 안에서 달을 피했습니다. 그들은 해와 달로부터 도망 다니는 모습이었지만,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 밖으로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노숙인 대부분은 눈빛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바쁜 사람들을 피해서 다녔습니다. 

 그들은 여름에도 춥다고 했습니다. 사철 두툼한 옷을 벗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한기가 몸속 깊숙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코로나 19로 역 안에 경비를 강화해서 노숙인의 출입을 단속하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노숙인을 발견하는 일이 흔치 않습니다. 하지만 무료급식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긴 줄이 생깁니다.


 이른 아침에는 교회, 건설 현장에서 사이 참을 먹을 10시쯤에는 천주교, 점심은 다시 교회, 또 오후 새참을 먹을 시간이 되면 천주교로 향했습니다. 저녁 식사는 광야교회에서 해결하고 밤 9시가 되면 영등포역 앞에서 불교 신자가 나눠주는 국밥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또 먹었는데, 늘 배고파했습니다. (현재는 코로나 19 때문에 대다수의 급식소는 폐쇄되었고 한 무료급식소에서 백여 개의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몸이 불편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팔다리가 멀쩡했습니다. 그렇다고 활기찬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걸음은 느렸고 얼굴은 무표정했습니다. 다만 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비슷했습니다. 구름이 엷게 낀 하늘처럼 그들의 눈빛은 빛을 잃은 듯했습니다. 

 저는 그런 눈빛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눈을 피하고, 자신과도 눈을 맞추지 않는 사람들의 눈빛을. 저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더럽고, 게으르고, 무책임한 것들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틀린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염치가 없어졌고 점점 더 무력해졌습니다.

 절망할 힘도 없는 절망 속에서, 먹고 싸고 쓰러져 자는 것 외에 하고자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숨 쉬고 있을 뿐,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됐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구덩이 속에서 저는 확실하게 길을 잃었고 자신을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절벽에서 떨어진 송아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겉모양은 멀쩡했는데, 송아지는 신음도 없이 온몸을 바르르 떨기만 했어요. 눈을 보았더니 초점 없는 텅 빈 눈동자였어요. 노숙인은 그 송아지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마음이 모조리 조각난 거예요." 

1987년부터 노숙인을 돌봐온 광야교회 임명희 목사님의 말입니다. 

 IMF 이후에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내몰렸습니다. 정부는 ‘부랑자’라는 말 대신 ‘노숙인’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들 저런 들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저는 죽어가던 그 송아지가 부럽기만 했습니다.      


 저는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홈 리스 센터 옥상 지붕에 앉아서 거리를 보곤 했습니다. 한적한 골목길에 갈 곳 없는 노숙인들이 칙칙,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며 걸어 다녔습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뻔했습니다. 슬퍼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죽음을 향해 그들은 걷고 또 걷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건 노숙인들의 죽음을 마주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삶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몇 달 지나자 꽉 막혔던 마음에도 조금씩 여유가 생겼습니다. 오히려 죽음이, 희망이란 것은 먼 곳에 있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은 여전했지만, 어깨를 토닥이는 따스한 손길이 있었습니다. 날 선 비판보다는 작은 응원이 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일 년 육 개월의 노숙인 쉼터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사회로 복귀했습니다. 그 후 한 권의 책을 출간했으며, 이제는 아프고 쓰러진 이들을 위해 살고자 합니다.


 저를 깊은 우물에서 건져준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그것도 맞습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제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있었기에 노숙인 생활을 벗어나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숙인의 발생이 개인의 문제인지, 구조적인 문제인지, 개인과 사회의 통합적인 문제인지는 학자들의 의견이 다양합니다. 저는 노숙인의 게으름과 무책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손가락질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한때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노숙인이 되었는지 일일이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다시 우리의 이웃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의 따듯한 관심이 넘어진 한 사람에게 전해져서 그가 일어설 힘을 얻고, 허리를 곧추세운 그가 다시 쓰러진 이를 돌아보는 일, 그런 일이 세상을 조금 더 훈훈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책이 노숙인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쓰러진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분들의 마음에 가닿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관심을 나눔으로 부메랑처럼 돌아온 그 사랑이 우리 자신의 아픈 마음까지 치유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디선가 피었을 라일락 향기가 작은 바람 속에 묻어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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