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새로운 계급
영웅이 필요한 시절입니다. 영웅이라고 하면 헐크, 아이언맨, 블랙위도우가 등장한 픽션의 세계는 물론이고 논픽션에서도 유관순 열사나 이한열, 박종철 열사를 비롯하여 우리와 같은 소시민인 유학생 이수현 씨가 언뜻 생각납니다.
우리는 많은 영웅을 봐왔고, 보고 있으며, 볼 것입니다. 이 영웅들이 남다른 기개와 추진력으로 고군분투하며 역경을 헤쳐나갈 때,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통해 힘을 얻고 감동하며 자신의 길도 개척해나갑니다. 달리 영웅일까요.
여기 영웅은커녕 패잔병도 이런 패잔병이 없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위기를 극복하기는 만무하고 더 큰 위험을 자초하는 듯합니다. 길에서 잠을 자고 술을 물처럼 마십니다. 인간의 존엄 따위는 내버린 지 오래입니다. 마치 불량인간 같습니다.
구호품을 든 봉사자에게는 머리를 조아리고, 약한 이에게는 큰소리치는 사람들, 게으르고, 더럽고, 사회의 가장 낮은 바닥에 자리를 잡은 그들을 우리는 노(露)숙인이라 부릅니다.
언론에서 노숙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 내용은 대개 비슷합니다. 사진만으로도 냄새가 날 것 같은 누추한 옷을 입고, 큰 짐보따리를 한쪽에 둔 채 대낮부터 술에 취해 쓰러진 모습이나,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구호품을 받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까 맞는다고 할 수도 있고, 많은 홈리스가 일자리를 구하고 있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틀린 내용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노숙인들 대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는 홍보용 사진처럼 더럽지 않을뿐더러 적게나마 돈을 벌고 있습니다. 공사현장에 나가거나 전단을 돌리고, 일부는 자활프로그램을 통한 일이나 공공근로에 참여합니다. 완전한 사회복귀는 아니지만, 그들은 노력 중입니다. 자신과 힘겨운 싸움 중입니다. 홈리스들은 아직 거리를 벗어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노숙인에 대하여서는 어떤 종교지도자나, 시설 운영자보다 그 사정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10여 년 전 저 역시 노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노숙인보다 노숙인을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10년이면 몇 번이나 지도가 바뀌는 세상이니까요.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현장을 둘러본 바에 의하면 크게 바뀌지도 않은 모양새입니다.
물론 정부와 노숙인 관련 단체의 성과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이 노숙인 자활시설, 다시 서기센터, 쪽방상담소 등의 복지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일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노숙인 관련 단체가 늘어나면서 문제도 생겨난 듯합니다. 바로 경쟁 아닌 경쟁이 시작된 건데요, 이들에게는 자극적인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깨끗한 옷을 입고 얌전히 줄을 선 노숙인의 모습에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들은 더러운 옷차림에 술 취해 쓰러진 노숙인, 서로 싸워 시퍼렇게 멍이 든 노숙인을 찾았습니다. 그런 사람 몇 명을 발견하는 일은 쉬웠습니다. 그러고는 그들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극적인 장면을 포착해서 세상에 알렸고, 사람들은 후원금을 보냈으며, 그들은 더 열심히 자극적인 사진들을 찍었습니다. 십수 년 동안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사회의 가장 최하층이랄 수 있는 빈곤계층이 당연한 듯이 게으르고 폭력적인 사람들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들은 국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정당한 복지 권리에서 소외되었으며, 무조건 동정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하물며 초등학생 사이에서도 제일 심한 욕이 '노숙인 새끼'라고 할 정도로 그들은 우리와 다른 계급이 되었습니다. 코로나 19 시대에 하루 한 끼 도시락으로 생명을 유지해도, 우리는 스스럼없이 '자초한 일 아니냐'며 그 모든 책임을 노숙인에게 떠넘깁니다.
개인의 문제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 구조적인 문제 또한 분명히 존재합니다. 어떤 노숙인은 이름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도 하지 못한 노숙인이 많습니다. IMF가 발생하고 거리로 내몰린 이들도 있습니다. 옥탑방, 쪽방, 급기야 판자촌이나 비닐하우스를 전전하다가 거리로 나온 그들도 한때는 우리의 이웃들이었습니다.
사회는 그들을 모른 척했습니다.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자 정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들의 호칭을 거지, 부랑자에서 노숙인으로 바꾼 일뿐이었습니다.
국토연구원에 의하면 고시원이나 쪽방, PC방 등 주택 이외의 거처에 사는 인구가 369,501가구이고, 최저 주거기준에(4.2평) 못 미치는 가구도 114만 가구입니다.
이들도 점점 좁은 방으로 옮겨가다가 어떤 절박한 상황에 부딪히면 언제라도 노숙인이란 새로운 계급을 달 수 있는 위기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정부는 많은 이들이 노숙 생활에서 벗어났다고 발표했습니다. 실제 길에서도 노숙인의 모습이 현저히 줄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간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부 관계자나 시설 운영자가 말하지 않는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저는 홀로 움직이고, 비영리 개인이며, 한 번 더 말하자면 전직 노숙인이기 때문입니다.
홈리스에 대한 의견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노숙인 때문에 못 살겠다는 주민들의 민원과 홈리스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시민단체의 의견이 충돌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특별 조처를 내렸습니다. 그 후 마법처럼 노숙인들이 거리에서 사라졌습니다. 영등포 거리의 500여 명에 이르던 홈리스들이 급속히 자취를 감췄고, 역사 안에서 이슬을 피하던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노숙인 쉼터 같은 보호시설에 입소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영등포 후문, 영등포 시장, 그리고 신길동 근처의 고시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에게 단기 거처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3개월 한정입니다. 재빠른 시설 관계자들은 이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노숙인들을 돌려가며(입, 퇴소를 반복하며) 장기 거처가 되도록 해주었습니다. 망가진 마음은 그대로 둔 채 주거만 마련해준 것인데, 직업도 없는 노숙인들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요.
그마저도 가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 거리에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이 심하거나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유럽은 정신 질병과 알코올 환자만을 위한 홈리스 센터가 별도 운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가 시급한 이들을 받아줄 시설이 국내에는 마땅치 않습니다.
재난지원금 이야기가 나왔을 때입니다. 먼저 소외계층이 언급되었지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와 장애인, 그리고 노숙인이 포함되었습니다. 몇몇 시민들이 반대 목소리를 냈습니다. 세금도 안내는 노숙인들인데, 왜 내가 낸 세금으로 지원을 하냐는 겁니다. 그런 목소리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노숙인에게도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거주 불명자, 주민등록 말소자인 노숙인은 신청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부산이 주소이면서 영등포에서 노숙하는 이는 한숨만 내쉬었고, 핸드폰 없이 세상과 단절한 상태의 홈리스 중에는 신청 방법조차 모르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을 돕는 손길이 있었지만, 노숙인 재난지원금 수령률은 11%대에 머물렀습니다. 세금이 아깝다던 시민은 괜한 걱정을 한 것입니다. 긴급 지원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뿐이었습니다.
코로나 19로 대부분의 무료 급식소가 폐쇄되었고, 간간이 쪽방촌을 찾던 푸드트럭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하루 한 번 100개의 도시락이 이들에게 배달됩니다. 노숙인 외에도 근처 노인들이 손을 내밉니다. 거동을 못 하는 일부 쪽방 주민도 도시락만 기다립니다. 결국,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 차별하냐? 누군 주고 누군 안주냐? 개***"
쌍욕이 날아옵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밥도 안 주는데, 왜 여길 지키고 있어요?"
한 노숙인에게 당돌한 질문을 했습니다.
한동안 묵묵부답입니다.
그가 누운 머리맡에 이슬을 담은 초록 병이 비석처럼 서 있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눈도 맞추지 않고 말합니다.
"그래도 여기서 죽으면, 화장은 해줄 거 아닙니까?"
아마도 그가 저대로 죽는다면, 노숙인 쉼터에서 장례를 치러줄 것입니다. 그도 여러 사람의 뼈가 모인다는 유택동산에 뿌려질 것입니다.
홈리스가 지탄받아야 할 새로운 계급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사회가 만든 구조적인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먼저는 저들 자신의 잘못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 스스로 저리 된 일이라고 해도, 쪽방에서 아무도 몰래 사람이 죽어 나가고, 출근하는 거리에서 시신을 발견하는 사회라면, 그곳이 과연 시민사회일까요?
유럽의 홈리스 비영리 조직 연합과 소외계층 지원을 위한 센터 협회 연맹에서는, 매년 캠페인을 엽니다.
그 구호는 이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민입니다. 홈리스가 아닙니다."
제각각의 구름이 소리도 없이 흘러갑니다. 탄성을 자아내는 멋진 구름도 있고, 못생긴 녀석도 있습니다. 이래저래 어울려 그럴듯한 풍경을 만듭니다.
나보다, 너보다, 우리라는 말이 많아지길 바라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동행이란 단어가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영웅이 그리운 시절입니다. 힘겨운 삶 속에서도 따듯한 마음을 잃지 않는 이웃들 말입니다.
바로 여러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