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회색이 좋다

by 고재욱

어젯밤부터 눈이 내렸다. 새벽까지 오다 말다 하던 눈이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쌓였는데, 광주원주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하늘이 어둑해지며 눈이 빗물로 바뀌었다. 20프로를 감속하라는 전광판의 걱정에도 본 척 만 척 차들이 빠르게 앞서간다. 하늘은 정오가 다 되도록 회색이다.


휑한 현장으로 나섰다. 얼마 남지 않은 빈 집을 둘러본다. 현관문이 반쯤 열려있고 창문은 엉성한 치아처럼 제각각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이상하리만치 금방 낡기 시작한다. 애써 버티고 있지만 남은 집들도 곧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생애주기라는 벗어날 수 없는 수레바퀴는 사람과 건물이 별반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다행인 건, 덧없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부서진 벽이며 기둥은 재생 콘크리트로, 고철은 새 철근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태어남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었지만, 떠날 때는 무어라도 남길 수 있는 마지막이기를.


두어 건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 보상문제 때문이다. 재개발현장에서 보상은 조합원이냐 아니냐에 따라 결이 다르다. 조합원은 재산의 평가액에 따라 아파트 분양을 받을 때 돈을 더 내거나 혹은 새 아파트보다 많은 금액의 평가를 받을 경우 차액을 돌려받는다. 조합원이 아닌 청산자는 평가받은 자산 그만큼의 돈을 받는다. 이를 현금청산이라고 한다. 평가는 관공서에서 정한 감정평가사 두 명이 담당하고, 이들은 각기 다른 회사 소속이다. 공정함을 위해 두 명의 평가사를 고용한다는 것이다. 평가를 받는다는 의미는 내 자산의 가치를 타인이 정한다는 뜻인데, 대부분 여기서 갈등이 생긴다. 평가를 하는 쪽은 냉정하고 받는 쪽은 후한 평가액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한 건물 외벽에 현수막이 여러 개 걸려있다. 맞닿은 벽 모서리를 두고 진영이 갈렸다. 한쪽은 조합, 또 한쪽은 교회에서 내건 현수막이다. 서로를 향해 날 선 내용을 적었는데, 섬뜩한 표현과 직설적인 문장을 사용한 점은 비슷하다. 상대를 탓하던 문구는 갈수록 구청과 시청으로, 시장과 국회의원으로 그리고 하나님까지 확장된다.

서로가 서로의 재산을 강탈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국가에서 책임지라는 주장이다. 하나님은 왜 두 손 놓고 있냐는 원망이다. 그런데도 도통 해결이 되지 않자 현수막을 하나둘씩 추가하며 억울함을 행인들에게 토로하는 것이다. 내 편이 되어달라는 것인데, 이를 바라보는 의견이 분분하다. 끝나지 않는 대립에 인근 주민들도 편이 갈렸다. 틀렸다, 맞다 다투는 이들까지 생겼다.

조합의 상황도, 교회의 입장도 익히 들었다. 양쪽 이야기를 들어보면, 두 진영 모두 피해자다. 가해자는 어디에도 없다. 피해자끼리 다투고 있다.

하루에 일억이 넘는 이자를 분담해야 하는 조합원들은 속이 탄다. 수십 년간 입지를 다져온 교회는 억울하다. 이 모든 상황의 법적 근거가 되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일명 도정법은 아무 말이 없다.



몇 달 전, 어둠이 겨우 걷히고 있던 이른 새벽이었다. 급작스럽게 이백여 명의 청년들이 현장에 방문했다. 건장한 체격이었다. 간간히 여성도 눈에 띄었다. 하나같이 셔츠를 입었거나 말끔한 정장차림이었는데, 옷색깔은 아래, 위 모두 검은색이었다. 그중 몇 명은 잔뜩 나온 배를 내밀고 두 팔을 좌우로 흔들며 걸어 다녔다. 무전기를 손에 든 그들이 청년들을 남아있는 건물 뒤쪽으로 모았다. 그 모습은 흡사 전쟁영화에서 본 전술 브리핑과 비슷했는데, 병사들의 결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눈에도 고등학생티를 갓 벗은 청년들이 많았다. 청년들은 군데군데 모여 담배를 피웠고, 무전기에서 끊임없이 무슨 소리가 났는데, 검은 옷들의 웅성거림에 잘 들리지 않았다. 가로, 세로줄을 맞춘 가지런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두어 시간 후에 무전기를 든 남자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신호를 시작으로 청년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날에 아무 통보도 받지 못했던 우리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건물 옥상에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옥상 가운데는 꼭대기에 십자가가 달린 뾰족한 탑이 서있었다.

옥상 쪽에서 간간이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고 큰 솥에서는 몽글몽글 아지랑이가 올랐으며 몇 사람은 옥상 난간에 한쪽 발을 올리고 고개를 난간 밖으로 내민 채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도로에서 교회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는 완전하게 막혀 있었다. 입구에 골목을 가로질러 봉고차를 옆으로 주차해 두어서 사람이 지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강제집행관이 교회로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공사현장 쪽에서 만들어 둔 작은 문밖에 없었다. 이 문은 근로자 출입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교회에 양해를 구한 터였다.


파이프와 천으로 만든 엉성한 문을 사이에 두고 검은 무리와 교회 사람들이 마주 섰다. 강제집행 집행관이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교회 쪽에서는 서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작은 문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때, 옥상에서는 끓는 물에 고춧가루와 정체 모를 붉은 가루를 털어 넣고 있었다. 옥상 난간 너머로 아래를 향해 바가지를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교회 관계자보다 청년들이 훨씬 많았지만, 겨우 두어 명씩만 지날 수 있는 작은 문을 통과해서 전진하기는 어려웠다. 의미를 알아듣기 힘든 날카로운 외침만 계속됐다.

연이어 카메라를 든 기자가 나타났다. 건너편 주민들이 모여들었고, 좁은 도로에 늘어선 경찰버스 때문에 자동차 경적소리가 커져만 갔다.

집행관이 고개를 저었다. "강제집행 불능"

오전 내내 현장에 복작거리던 검은 무리들이 일거에 사라졌다.



교회의 호출이다. 왜 강제집행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는 거다. 익히 알고 있던 교회의 입장을 왼쪽 귀로 듣는다. 한 시간 동안 복습이다. 말을 마친 그가 덧붙인다. 당신네 회사가 뭔 잘못이 있겠냐고. 피해자끼리 싸우지 말자고 한다.

조합에서 호출이다. 어찌 교회에서 미리 대비할 수 있었냐는 거다. 정보가 새 나간 것이 분명하다는 입장이다. 조합의 답답해하는 입장을 오른쪽 귀로 듣는다. 복습에 복습이다. 이쪽 말에는 이쪽이 이해되고 저쪽 말에는 저쪽이 이해된다.


살다 보면 명료하게 드러날 때 좋은 일이 있고 가끔 어떤 일은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는 일도 있다. 울고 있는 이가 원하는 것이 명확한 정답을 말해주는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나는 자주 회색을 선택한다.

당분간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이런저런 입장을 들을 것 같다. 피해자들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괴로움을 이야기할 것인데, 나는 조용히 들어줄 것이다. 어차피 정답을 알지도 못하니까.

그런데, 설마 두 귀에 피가 나는 건 아니겠지.



회색 하늘 아래 탐스런 구름이 느리게 지나간다. 그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빼꼼 인사를 한다. 오전 내내 잿빛 하늘이 아니었다면, 덜 반가왔을 싱그런 하늘이다. 선명하지 않음으로 다른 색을 돋보이게 한다. 회색을 좋아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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