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르신들과 대화를 할 때 자주 써먹는 질문이다. 어르신들은 옛날 옛적 이야기를 좋아하신다. 딱히 희망적인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일수도 있겠고 대화 자체를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바쁜 요양원 일과 중에 어르신과 잠시 나누는 옛날이야기는 내게도 즐거운 일이다. 더 좋은 건 어르신은 매일, 같은 내용을 말하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다. 좋은 건가? 내가 던지는 같은 질문에 어르신은 늘 처음 들은 질문으로 느끼고 신나게 같은 내용으로 대답하신다. 나는 다른 질문을 준비해야 할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어르신은 그때마다 기억을 떠올리며 즐거워하니 좋은 거 맞다.(고 생각한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 그러니까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키우던 때였다. 할머니가 살던 곳은 정미소가 있을 리 만무한 시골 마을이었다. 지금은 집 앞 편의점에만 가도 햇반이라는 밥 한 그릇을 구할 수 있지만 그때는 사정이 달랐다. 쌀은 구경하기 힘들었던 시절이었고 주식은 보리밥이었다. 밭에서 수확한 보리는 껍질을 벗기지 않고 보관했다. 적당량을 먹을 때마다 찧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먼저 보리를 물에 불린다. 그다음에 보리를 찧었다. 이때 방아를 이용했다고 한다. 내가 농사 박물관에서나 보았던 방아였다. 물레라는 단어가 빠진 방아는 사람이 발로 밟는 방아를 말한다. 방아 한쪽 끝을 발로 눌렀다가 발을 떼면 반대쪽 끝이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힘으로 보리를 찧는 식이었다. 이게 끝? 아니다. 이렇게 찧은 보리를 까불어야 했다.
'키'라는 도구를 모르는 사람은 상상이 안될지도 모르겠다. 이 '키'를 이용해서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야 한다. '키'는 대나무나 고리버들을 납작하게 쪼개 만들었다. 앞은 넓고 평평하게 생겼고 뒤쪽은 좁았다. 여기에 보리를 넣고 보리를 허공에 던져 올리며 가벼운 껍질을 날려 보낸다. 이걸 까분다고 한다. 참고로 내 또래의 사오십 대 남자는 어릴 때 이 '키'를 머리에 쓰고 옆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 온 기억이 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있다. 크윽. 여기까지 하면 보리밥을 먹을 수 있을까. 아직 멀었다. 실컷 까분 보리를 이제 말려야 한다. 기다리자, 마를 동안.
보리가 다 마른다. 이제는 보리밥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이다. 다시 보리를 물에 불린다. 찧고 까분다. 또 말린다. 방아의 성능은 여전히 좋지 않다. 한번 더 찧고 까불고 말린 다음에야 드디어 보리밥을 먹을 수 있다.
휴! 밥 한 끼 먹기 참 힘들었다. 이 과정을 끼니때마다 했다니 말하는 할머니도, 듣는 나도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할머니가 전하는 보리밥 먹기를 듣다가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건 글쓰기와 똑같지 않은가. 보리라는 글감이 있다. 글감에 생각을 적신다. 문장을 쓴다. 말랑해진 보리를 방아로 찧는다. 문장을 다듬는 것이다. 키질을 해서 까분다. 글의 흐름에 맞게 문장, 문단 순서를 바꾼다. 쭉정이와 티끌을 날려 보낸다. 필요 없는 조사, 부사, 없어도 되는 말을 걸러낸다. 이제 말린다. 이게 중요하다. 글을 묵혀둔다. 적당히 마른 글을 꺼낸다. 반복이다. 생각에 생각을 적시고 찧고 까분다.
끝도 없이 반복하지는 말자. 보리를 가루로 만들 게 아니라면 말이다. 구수한 보리밥 냄새가 벌써 나는 것 같다. 글이 곧 완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