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단문이 유행이다. 그래야 읽힌다는 거다. 긴 문장은 읽는 독자에게 불편을 제공한다는 이유다. 짧은 시간 정보를 파악해야 하는 신문 기사문은 물론 그래야 한다. 그저 사건의 내용을 알기만 하면 되니까.
종이책 읽기에 비해 모바일 스크린에서 글 읽기라는 새로운 플랫폼은 더욱 짧은 문장 쓰기를 요구했다. 10초 안에 사로잡을 것, 30, 3, 3의 법칙도 있다. 30초 안에 독자를 머물게 하면 3분을 잡아두고 30분을 읽게 할 수 있다는 거다. 맞는 말이다. 도무지 읽히지 않는 글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럼에도 만약 짧은 문장이, 쏙쏙 머리에 들어오는 단문이 당신의 뇌를 망치고 있다면 계속해서 그 쉬운, 달콤함을 찾을 것인가? 묻고 싶다. 놀랍게도 이러한 내용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책으로' 저자인 매리언 울프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계속 직면하는 정보 과잉의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쉽게 소화되고 밀도도 낮으며 지적인 부담도 적은 정보들로 둘러싸인 익숙한 골방으로 뒷걸음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낍니다. (다시, 책으로. P35.)
한 문장을 써보겠다. 무엇이 느껴지는지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기를 바란다.
팝니다: 아기 신발, 사용한 적 없음.
위 문장은 한 문장으로 쓴 헤밍웨이의 초단편소설이다.이 문장을 읽고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을 흘렸다면 당신은 이미 깊이 읽는 사람이다. 이 글을 함께 해도, 지금 떠나도 좋다. 위 문장에 아무런 감흥이 없고 신발의 치수나 가격이 궁금하다면 나와 함께 이 탐구를 계속하길 바란다.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 때문에 쉽게 주의력이 분산되고 그 결과는 책을 읽는 데에도 상당한, 깊이 읽기에 방해받고 있다.
나는 몇 개월 전까지브런치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네이버 블로그에 열심히 글을 올린 지도 몇 개월 정도이다. 블로그 이웃의 글에서 브런치를 알게 됐다. 무작정 브런치 도전이 이어졌다. 블로그 이웃들의 선하기만 한 댓글의 힘이었다. 당연히 연달아 브런치 심사에 탈락했다. 나는, 아 왜? 블로그 이웃들은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는데 도대체 왜?라고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그게 두 번째 탈락했을 때다.
세 번째 도전은 내 문장을 완전히 뒤집었다. 철저하게 장문을 단문으로 바꿨다. 접속사는 모두 없앴다. 거의 기사 형식의 글을 브런치에 보냈다. 내용 전달은 잘 됐겠지만 아름다운 문장은 없었다.(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나는 4수 만에 브런치 작가에 합격했다. 브런치는 문장의 아름다움을 살피는 곳은 아니었다. 브런치에 입성한 후 두 번째 글을 올렸을 때였다. 아침부터 징징~ 휴대폰이 몸을 떨었고 그 경련은 계속되었다.
'조회수1,000명이 넘었습니다.'
2,000. 3,000... 하루 만에 조회수 만 명이 넘어갔다. 내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이틀쯤 지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잠해졌다. 조회수는 잠시 내게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흥분을 줬지만 무의미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브런치에 발표되는 글들은 어떨까? 브런치 메인 카테고리 분류만 봐도 알 수 있다. 잘 읽히는 내용들이 전면에 있다. 글쓰기 코칭 분야의 글에서도 글은 잘 읽혀야 한다고 그 세부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나 역시 글은 잘 읽혀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말이다. 글 쓰는 이의 목적은 독자에게 읽히는 글을 쓰는 것보다(조회수와는 상관없다.) 자신의 글을 통해 독자에게 삶의, 혹은 가치의 갈등을 제공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저자를 넘어서는 진리 발견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왜 돈과 시간을 써가며 책을 읽겠는가. 나는 독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는 이가 스스로의 삶을 독서를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고 싶다.
헤밍웨이의 초단편소설로 돌아가 보자. 헤밍웨이는 술집에서 친구들과 내기를 했다. 여섯 단어로만 소설을 쓰기로. 다들 여섯 단어 소설 쓰기는 불가능이라고 했다. 결과는 헤밍웨이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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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왜 이 문장을 소설이라고 했을까? 이 짧은 문장에 아이를 잃었을지도 모를 엄마의 아픔이, 아기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아기를 기다렸던 설렘이, 내 아기가 신지 못한 신발을 다른 아기에게라도 신기고 싶은 부모의 애틋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문장 뒤에 숨긴 내용을 독자가 채우길 바란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깊이 이해한 독자는 자신의 삶에 동정 혹은 사랑 한 조각을 넣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하는 탓에 그것을 지각하는 능력이 사실상 줄어들고 있다면 어떨까요?
(철학자, 요제프 피퍼)
우리가 우리 일상의 상당 부분을 강화된 감각적 자극들에 사실상 중독되어 끊임없이 그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안식일의 세계, 주디스 슐레비츠)
<<다시, 책으로. 매리언 울프 중 발췌>>
바쁜 세상이다. 일도 글도 단순 명료한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 뇌는 쓸수록 능력이 활성화된다. 이를 뇌연구 분야에서는 마태효과라고 한다. 성경에서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뺏기는 자는 있던 것도 뺏긴다'란 구절에서 가져온 말이다. 깊은 속 뜻을 숨기지 않은 단문으로 가득한 글은 글쓴이의 정보는 잘 전달될지 모르지만 읽는 이에게는 유익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우리 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연산을 즐긴다. 다만 훈련이 필요할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독자의 뇌 활성을 위해서도 글 쓰는 사람은 단순하게 정보전달을 위한 단문 쓰기를 두려워해야 한다. 정보전달은 신문, 방송이 할 테니까. 헤밍웨이의여섯 단어로 된 소설처럼 글에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바람길이 있어야 한다. 전달이 다가 아닌 인지적 공감이 흘러야 한다. 모든 글쓰기의 목적은 감동일것이다. 결국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감동을 통한 우리라는 공감이 아닐까 싶다.
글 쓴 이의 역동적인 고요한 눈이, 멈춰있는 고요한 독자의 삶을 흔들어야할 것이다.
내 글을 읽는 독자의 머리가, 뇌가 조금은 흔들리기를 바라며 이 글을 발행한다. 그렇다고 머리를 흔들지는 마시길.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박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