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에 도둑비가 내렸다. 창밖으로 몰래 내리는 비에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봄이 아직 오기 전 2월, 데워진 유리창에 달라붙은 찬 공기가 언 몸을 녹이며 물방울로 흘러내릴 때 나는 침대에 누워 '미드'를 보며 커피 향으로 가득한 방에서 따듯하게 잠이 들었다.
평일이었고 쉬는 날이었다. 나는 가까운 산책로를 찾았다. 왕복 한 시간 정도의 길지 않은 코스였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제 속의 물을 다 말린, 벚나무들이 길게 서있었다. 마른 잎 몇 개가 놓아야 할 끈을 놓지 않고 가지에 붙어 흔들렸다. 큰 벚나무나 덩굴로 낮은 담장을 이룬 들장미에도 아직 움은 보이지 않았다. 산책로 오른쪽으로 하천이 있다. 가장자리에 얼음이 있었지만 하천 가운데는 물이 보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끝이 시리기 시작했다. 콧물이 맺혔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아직 많이 추웠다. 그때 이상한 장면과 마주쳤다.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2019년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장면은 아무래도 2019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눈앞의 상황에 혼란스러웠고 처참했고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저 축축하고 찢어진 종이의 주인은 누굴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일 것이다. 왜 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주위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들을 봐 와서겠지. 노인은 새벽부터 길거리, 상가 주변, 주택가를 돌며 종이를 주웠을 것이다. 2월의 새벽은 매서운 한기를 품고 있다. 노인은 낡은 점퍼의 깃을 한껏 올렸을 테지만 따뜻할리는 없었겠지. 겨울바람처럼 거리를 기웃거리며 작은 손수레에 폐지를 쌓았을 노인이었다. 종이상자 하나에 늙고 병든 어머니나 혹은 아내를 떠올렸을 것이다. 노인의 손톱에는 검은 때가 끼었을 것이고 노인의 손이 추위에 얼어갈수록 손수레에 놓이는 폐지는 높아졌겠지. 그렇게 노인은 새벽의 노동을 무사히 마쳤을 것이었다. 지난밤 도둑비만 아니었다면. 내가 마신 커피 향을 더 분위기 있게 만들어준 몰래 내린 그 비만 아니었다면.
순식간에 기름과 양식에서 쓰레기로 변한 폐지를 노인은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쳐다봤다. 한동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던 노인은 축축한 종이박스 하나하나를 바닥에 널어놓기 시작했다. 박스 하나는 기침을 멈추지 않는 병든 아내의 약봉지였고 또 하나는 바싹 마른 나이 든 어머니의 살이 될 것이라고, 끝내 그 많던 종이 조각을 빨래처럼 말려놓은 노인이었다. 동쪽 산너머로 늦은 해가 머리를 내밀었다. 노인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는 듯했다.
축축한 종이에 햇볕이 부딪쳤다. 눈이 부셨다. 지난밤, 이런저런 생각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폐지 사이에 생각들 몇 개, 몰래 놓아두고 아무것도 못 본 척 돌아섰다. 말라가는 종이에서 밥 익는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