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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을수록 달달한

기억 속에 소나기는 없지만

by 고재욱

낯 간지러운 이야기일 수 있겠다. 마흔 하고도 후반의 나이에 어린 소녀를 떠올려본다는 것이. 그렇지만 잊을만하면 생각나서 그때의 소녀를 그리워하는 일은 자주 휘청거리는 내 삶에 비타민 같은 기억이다. 나와 그 소녀의 만남에 여름 소나기는 없었지만 그 아이는 도둑비처럼 내 가슴을 적시곤 했다. 40여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소녀가 내리는 비는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기꺼이 그 아이에게 시간을 비워준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그 아이를 탓하지 못할 것은, 소녀를 불러낸 쪽이 나였기 때문인데, 매번 그랬다.



나는 1983년에 경희와 만났다.(전국의 수많은 경희 씨는 긴장하시라!)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초등학교가 우리가 다닌 학교다. 이 학교는 현재도 문을 열고 있다. 꽤 장구한 역사를 가진 학교다.


출생지가 서울이었던 덕에 서울 물을 조금 맛보았던 나는 여느 아이들과 조금 다른 데가 있었다. 할머니와 엄마의 증언이 있다. 예를 들면 내 말투는 서울말과 사투리가 반씩 섞여있었고 사진기 앞에서 아이들이 어쩔 줄 몰라할 때 나는 한 손을 옆구리에 받치고 배를 잔뜩 내민 채 나머지 손으로는 V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포즈였다.

내게는 서울 물을 나보다 좀 더 먹은 누나가 있었는데, 학교 전교 회장이었고 내 든든한 배경이었다.


그 아이, 경희를 만난 건 막 5학년이 되어 새로운 교실을 찾고 있을 때였다. 배정받은 교실에서 나는 나보다 더, 서울 물을 먹은 누나보다 더, 서울 물을 먹었을 것 같은 여자애를 발견한 것이다. 그 당시 여자애들의 머리 스타일은 한 가지가 유행이었는데, 바가지 머리였다. '가리 야기'라는 커트 스타일이 가끔 보였지만 드문 일이었다. 서울 물을 조금 먹었던 나도 바가지 하나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길이의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땋은 경희의 머리 스타일에 사진 찍을 때 V자를 만들던 내 파격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서울 물을 한주전자는 먹은 것 같은 경희가 내게 먼저 말을 건 거였다.

ㅡ 네가 재욱이구나. 전교회장 동생.

사... 사투리가 아닌... 섞인 것도 아닌 순전한 서울말이었다.

나는 대답도 못 하고 급하게 교실로 뛰어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얼굴은 잘 빨개진다. 모세혈관이 문제라면 고치기라도 할 텐데. 내 모세혈관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명됐다.

경희는 빛나고 빨간 구두를 신었다. 나는 그런 구두는 어디서 샀을까 궁금했다. 시골 장터에서 보기 힘든 구두였다. 나는 지구를 지킨다는 뾰족한 머리가 매력인 '아톰' 신발을 신고 있었다. 빛나지는 않았다. 경희는 빨간 신발 위로 하얀 양말을 장딴지까지 올려 신었다. 무릎을 살짝 덮은 분홍치마가 흰 양말과 닿을 듯 말 듯 애를 태우고 있었다. 나는 두 무릎에 동그란 천을 덧댄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 무릎 쪽이 자주 헤어져서였다. 그날은 두 주먹을 무릎 위에 올리고 차렷 자세를 유지했다. 나는 다시는 그 바지를 입지 않았다. 엄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바지를 잘라 고양이와 강아지에게 선물했다. 경희는 시골에 살면서 시골에 사는 아이 같지 않았고 나는 시골에 살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시골에 사는 시골아이였다.


경희의 집은 읍내였다. 읍내라고 해보았자 서울 변두리보다 가진 게 적었지만 읍내에는 시장이 섰고 옷가게라든지 중국집이라든지 읍내 바깥에는 없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도 목욕탕은 마을을 통틀어 읍내에 딱 하나 있었다. 나는 5학년이었지만 키가 무척 작았다. 초등학교를 7살에 입학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원체 작았다. 나는 내 키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엄마는 내 작은 키를 요긴하게 이용하기도 했다. 엄마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목욕탕 주인이 나를 노려봤다.

- 몇 살 이가?

- 2학년인데요.

- 진짜가?

-진짠 데요.

엄마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초등학교 3학년 정도까지 남자아이의 여탕 출입이 허용되었던 것 같다. 나는 5학년이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여탕 출입 남자아이 나이를 6세에서 5세로 낮춘다는 기사를 봤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때를 밀기만 했다. 더운 공기에 내 모세혈관은 비정상적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욕탕에 온 몸을 담근 엄마가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이었다. 나는 몇 번 등만 보인 채 거부를 했지만 때를 불려야 한다는 엄마의 손에 끌려 욕탕에 몸을 담가야 했다. 그때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 아니 한 번도 보지 못 한 몸이 욕탕을 향해 오고 있었다. 내 얼굴의 모든 혈관이 터져버리는 것 같았다. 욕탕을 채운 물이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오른쪽에서부터 경희, 경희 할머니, 엄마, 내가 나란히 앉았다. 평소 안면이 있던 경희 할머니와 엄마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음소리가 섞인 대화를 했고 나는 소금기둥이 되어야 했다. 경희는 내가 없는 쪽을, 나는 경희가 없는 쪽을 바라본 것 같다. 이 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엄마와 목욕탕 가지 않겠노라' 선언했고 엄마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를 허용해주었다.


며칠 후, 나는 경희에게 불려 나갔다. 경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너, 다 봤지?

- 안 봤어.

- 뭘 안 봐. 다 봤잖아.

- 뿌예서 하나도 안 보였다니까.

경희는 집요했다.

- 거봐. 보려고는 했다는 거잖아.

-......


나는 고개를 숙였다. 경희도 고개를 숙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고 경희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잘못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목욕탕에는 수증기가 거의 없었다. 시야는 선명했다. 입구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경희를 한분에 알아본 나였다. 나는 경희가 왜 우는지 잘 몰랐다. 저도 날 봤을 텐데 그럼 나도 울어야 할까 생각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 울던 경희가 울음을 그치고 나를 노려봤다.

- 애들에게 말할 거야?

- 말 안 해.

- 뭘 말하지 않을 건데?

- 너 알몸 본 거.

경희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 거봐. 역시 다 본 거잖아.

-......


나는 경희와의 관계를 걱정했지만 며칠 지나자 경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지만,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경희를 대했다. 가끔 경희가 날 불러내어 내 입단속을 했다. 기억이 사라질 만하면 경희는 그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이 일은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는데 둘이 있는 모습을 누군가 본 모양이다. 화장실에 경희와 내 이름이 적히기 시작했다. 이상한 건 경희는 화장실 벽에 적힌 우리의 이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서 초등학생들이 시간을 보내는 곳은 거의 바닷가였다. 경희와 난 바닷가에 놀러 가기도 했는데 경희가 내 손을 덥석 잡을 때가 있었다. 내 모세혈관이 열일하면 경희는 '네 얼굴에 노을 떴다'며 나를 놀렸다. 갈매기가 까르륵 울었고 경희는 까르륵 웃었다. 먼바다로부터 밀려온 어둠이 해변을 다 덮을 때까지 우리는 바닷가를 정탐했고 작은 아이들을 찾아 나선 부모들의 손에 붙들려가는 날들이 늘어갔다. '경희와 재욱이 얼레리 꼴레리' 낙서는 화장실을 넘어 칠판까지 점령했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5학년 2학기가 끝나기 전에 나는 서울로 전학했다. 경희는 서울에 가서도 입조심할 것과 꼭 편지할 것을 당부했다. 나는 편지하지 않았다. 이사 도중에 주소 적은 종이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편지가 익숙한 시절도 아니었다. 서울에는 서울 물을 많이 먹은 여자아이들이 많았다. 난 금세 경희를 잊어버렸다. 잊어버린 줄 알았다. 경희가 부산에서 대학공부를 한다는 소식을 얼핏 듣긴 했다. 군대 가기 전 남해초등학교를 지나며 들은 얘기다.




경희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느낌만 남았다.

나는 5년 전에 머루주를 담갔다. 무릎 높이의 투명한 유리병에 머루를 가득 채우고 술을 부었다. 1년, 2년, 지날수록 검푸른 색이 짙어졌다. 5년이 지났지만 난 그 술을 마실 생각이 없다. 가끔 꺼내서 익어가는 색깔을 보는 것이 참 좋기 때문이다.

경희와 만났던 목욕탕이, 함께 거닐었던 바닷가가, 36년 전 어린 날의 기억이 내게는 익어가는 머루주 같다.

가끔씩 꺼내서 바라보기만 하는, 익을수록 달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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