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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통에 빠진 날

오래 살게 된 날이었다.

by 고재욱

40년도 훌쩍 넘은 일이다. 산 한쪽 면을 따라 집들이 들어선 시골마을이었다. 내가 살던 집은 마을의 마지막 집, 그러니까 거의 산 꼭대기였다. 그곳에는 파란 양철 지붕에 시멘트 블록으로 지어진 집 한 채와 집 앞에 텃밭이 있었고 왼편으로 흙 계단을 몇 개 오르면 벽돌로 지은 축사가 있었다. 하얀 돼지 두 마리가 축사의 주인이었다. 마당에는 점박이 포인트 종 '잭키'가 있었고 집 어딘가에는 나이를 먹어 주인 말을 잘 듣지 않는 고양이도 있었다. 집 울타리로 치자나무를 심었는데 하얀 치자꽃이 피는 6월이면 집안에 치자 향기가 가득했다. 엄마는 치자열매를 실에 꿰어 마루 위 들보에 매달아두기도 했다. 이 집에는 대문이 없었다. 뭐 가져갈 것도 없었다. 입구 왼쪽으로 벽돌로 지은 작은 건물이 있었고 이곳이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은 푸세식이었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닥이 나무판으로 덮였는데 밟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나무판의 정중앙에 사각형의 구멍이 나있었고 구멍 양쪽으로 두 발을 딛고 쪼그리고 앉아 일을 보는 거였다. 어른 몸에 맞춘 구조였기 때문에 다섯 살인 아이는 두 다리를 한껏 벌리고 일을 치러야 했다.


어른들은 일하러 나가고 나 혼자 잭키와 시간을 보내던 날이었다. 잭키는 온순하고 상냥했지만 나보다도 덩치가 큰 잭키가 한 번씩 내 품에 달려들 때면 녀석의 무게에 내 몸이 뒤로 넘어질 때가 많았다. 녀석과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린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때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화장실로 가야 했다. 재래식 화장실은 낮에도 어두컴컴했다. 무서웠다. 나는 잭키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기로 했다. 녀석이 옆에 있어주면 두려움이 덜 할 것 같았다.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작은 전구는 화장실 구석구석을 비추지 않았다. 화장실 앞쪽으로 빈 공간이 있었는데 언제 썼는지 모를 농사기구가 널브러져 있었고 벽에는 새끼줄이 똬리를 틀고 걸려있었다. 잭키는 코를 킁킁거리며 화장실 구석만 골라 돌아다녔다. 나는 고개를 들어 화장실 천장을 쳐다보기도 하고 아래쪽을 주시하기도 했다. 혹시 나올지도 모를 빨간 손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보통은 엄마나 누나가 동행하는 화장실이었다. 잭키와 함께 온 적은 없었지만 조금 안심은 되었다. 잭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잭키를 조용히 불렀다. 나는 정말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한쪽에서 딴청이던 잭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내게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두 손을 마구 흔들었다.

'오지 마. 오지 마. 저리 가라고.'

잭키의 걸음 몇 번이면 닿을 거리였다. 녀석은 내 가슴팍으로 달려들었다. 평소 우리의 놀이 방식이었다. 잭키의 머리가 내 가슴을 밀었고 나는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내 뒤는 뻥 뚫려있었다. 나는 잭키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각형의 구멍 사이로 잭키가 짖고 있었다. 녀석은 구멍 속으로 머리를 넣어보기도 하고 나무판을 발로 긁기도 했다. 다행히 딱딱한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어서 나는 곧 중심을 잡고 일어날 수 있었다. 허리쯤까지 그것들이 올라와있었다. 나는 뚫린 나무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잭키의 그림자를 보며 울기 시작했다. 내 울음소리와 잭키의 짖는 소리가 작은 화장실을 들썩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잭키의 그림자도, 소리도 사라졌다. 나는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에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잭키는 곧장 아랫집으로 향했다. 할머니 혼자 사는 집이었다. 다급하게 짖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당시의 시골마을은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있지 않았다. 집에 딸린 텃밭이 있었고 짐승을 키우는 축사도 있어서 집들은 덤성덤성 떨어져 있었다. 높은 산에서 바라보면 바다의 섬들 같기도 했다. 아무리 짖어도 인기척이 없자 잭키는 다른 집을 향했다. 이번엔 약초를 잘 안다는 할아버지 집이었다. 마당에서 약초를 널고 있던 할아버지를 발견한 잭키는 한달음에 달려가 할아버지의 바짓단을 물었다.

"이놈의 개가 미칬나? 저리 안 가나?"

평소 온순한 성격의 잭키를 알고 있던 할아버지였지만 큰 개가 갑자기 달려들어 바짓단을 물고 끌어당기니 놀라셨다고 했다. 잭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지를 끌어당겼다. 할아버지는 경험이 많은 약초꾼이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

"와 그러나? 아가 뭐 사고라도 난기가? 가보자 꾸마."

할아버지가 나설 차비를 하자 그제야 잭키는 물고 있던 바짓단을 놓고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금세 동네 어른들이 우리 집 화장실 앞에 모였다. 재래식 화장실은 바깥에서 똥을 퍼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슬레이트 판으로 막아둔 똥 퍼내는 곳을 열자 아이 하나쯤은 기어 나올 공간이 생겼다. 약초 할아버지가 화장실에 걸려있던 새끼줄을 화장실 안쪽으로 내렸다. 나는 새끼줄을 허리춤에 단단히 감았다. 할아버지의 지시가 있었다. 어른들이 새끼줄을 당겼고 나는 호랑이를 피하던 남매가 잡았을 동아줄을 잡고 화장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약초 할아버지는 줄을 당기는 어른들의 맨 앞에 섰다. 큰 망태기를 짊어지고 잘 벼른 낫을 들고 다니는 통에 평소 무섭기만 했는데 할아버지는 아무 걱정 말라며 다정한 말을 건넸다.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땅에 올라온 나는 가장 고마운 사람, 약초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오지 마라. 오지 마라케도. 저리 가."

할아버지는 나를 피해 도망갔다. 그 때문에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나는 주위를 돌아봤다. 아랫집 할머니가 보였다. 나는 할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저리 가래도."

아랫집 할머니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를 피하는 어른들에게 너무 서운한 마음이 든 나는 이제 아무나에게 돌진했다. 누군가 다정하게 안아주기를 기대하면서.

"오지 마라. 오지 마. 가만있어라. 오지 마...."

어른들은 연못에 던진 돌이 만든 물결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돌은 나였고 말이다.


잭키가 내게 달려왔다. 1초의 망설임도 없는 잭키였다. 내게서 멀찍이 떨어진 어른들은 코를 막고 있었다. 나는 잭키를 끌어안고 서럽게도 울었다. 소식을 듣고 엄마가 달려왔다. 엄마를 보자 나는 더 서럽게 울며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가 다급하게 외쳤다.

"오지 마, 오지 마라......"

결국 나는 엄마를 안지 못했고 엄마는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소방수처럼 긴 호수를 잡아야 했다.

내 곁에는 잭키뿐이었다. 약초 할아버지는 미소를 띠며 한마디 덧붙였다.

똥 통에 빠졌으니 장수할 거다.



정말 장수하게 될까?

모두 나에게 등을 돌릴 때 내게 달려온 잭키 같은 친구가 없다면 오래 산다는 게 무슨 소용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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