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치매에 걸릴까?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만난 치매환자 중에는 술을 즐긴 사람이 있었고 술을 마시지 않던 사람도 있었다. 담배를 핀 사람이 있었고 담배를 모르던 이가 있었다. 내성적인 사람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했지만 활발한 성격의 사람이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왔다. 의사가 치매에 걸렸고 고위직 공무원이 그랬고 농부라고 치매를 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돈이 많아도 돈이 없어도 치매에 걸렸고 부부가 치매에 걸리기도 했고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요양원에 보내기도 했다. 자녀들이 부모의 치매에 고개를 숙였고 부모가 자식의 치매에 비통해했다. 치매는 아무나 걸렸다. 누가가 아니었다.
치매 초기의 노인들이 대화를 나눈다. 나는 옆에서 내용을 들었다.
- 이리 살아서 뭐하겠나.
- 죽지도 않고 힘들어 죽겠네.
- 내가 왜 이렇게 된 건지 속상해.
신세 한탄의 내용이었다. 한 노인이 목소리를 키웠다.
- 늙어서 이 정도만 하면 됐지. 아주 드러누운 것도 아니고 애들 면회 오겠다, 집구석에서 자식들 고생시키는 것보다 이리 생활하는 게 어떻다고들 그래.
- 누가 안 그렇대. 아유, 왜 안 죽어.
애당초 답이 없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주제였다. 노인들은 독백으로 대화 중이었다.
나는 왜, 이 무서운 치매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다들 나는 아직 치매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치매와는, 멀어도 한참 멀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요양원에서 지내는 노인들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건 성격이나 습관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노인들이 요양원에 입소하기 위해서는 치매 발병 전의 성격이나 생활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데, 평소 말이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은 치매 발병 이후에도 그랬다. 온화한 성품은 치매 이후에도 계속됐다. 정리 습관이 있던 사람의 루틴은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자신밖에 모르던 사람은 병이 온 후에 더 자신밖에 몰랐고 나눠주던 사람은 치매 이후에 더 나눠줬다. 이런 일은 비정상적으로 증폭되기 때문에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성격과 생활 태도를 치매가 완전히 바꾸는 것은 아니었다.
치매 걸렸을 때를 대비해서 성격과 습관을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평소 삶의 태도가 얼마나 끈질기게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라든지, 사람을 대하는 행동이든지, 삶은 끝이 있고 나 역시도 늙고 죽을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 말이다.
며칠 전 한 남성이 요양원에 입소했다. 70 중반의 노인이 사용했던 침대는 비어있었는데, 이제 60 초반의 남자가 사용한다. 죽은 노인의 자리에 산 노인이 들어온다. 산 노인은 언젠가 죽은 노인이 되고 언제고 젊은이가 노인이 되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이런 일을 보면서 나는 죽음 앞에서 겸손해지고 삶 앞에서, 다시 겸손해진다. 나는 치매 환자들을 존중한다. 나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는 치매환자로서의 정상적인 행동을 인정한다. 흔하지는 않지만 치매를 앓고 있으면서 타인을 걱정하는 노인의 말에 나는 감동한다.
언젠가 치매가 나를 찾아올 수도 있다. 그때에도 나는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거칠고 폭력적인 모습은 더욱 싫다. 품 안에 쌓는 것보다 나누는 나이고 싶다.
치매를 예방하는 방법을 찾아봤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나에게는 그게 글쓰기인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 글을 쓴다.
글쓰기라는 정(釘)이 나를 찌를 때마다 군더더기가 떨어져 나간다. 글쓰기가 나를 다듬고 있음을 느낀다. 머지않아 '오귀스트 로댕'의 남자가 드러날지 모르겠다. 혹은 오줌싸개 소년일 수도 있지만.
치매가 나를 비껴갈지 관통할지 간에. 나는 삶을 들여다보고 나를 쓰겠다. 오늘이라 불리는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