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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Dec 13. 2021

우리는 '불멸'을 원하는가

불멸을 향한 욕망의 몸짓

"내게 있어 진정한 삶이란 그런 것 같아. 다른 누군가의 생각 속에 살아 있는 것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난 산송장이나 다름없어."  밀란 쿤데라 - 불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다음 저서인

'불멸'  구절이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가 흔히 '불멸'이라고 하면 생각하는 영생의 이미지를 뒤엎고, 새로운 생각을 제시한다. 밀란 쿤데라가 말하고자

 소설  불멸은, [죽고  이후에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어떤 불멸을 얻을 것인가]라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죽고 나면, 좋든 싫든 가족, 친구, 혹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불멸을 얻게 된다. 그 불멸이 행복한

이미지가 되어서 산 사람과 공존할 수도 있는 반면, 어떤 이에겐 증오스러운 불멸이 되어서, 잊으래야 잊히지 않는 추악한 불멸을 얻게 될 수도 있다. 이 책에 주인공인 '베티나'는 그 누구보다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불멸을 얻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괴테에게 (요한 볼프강 본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유명한 작가) 접근한다. 그 당시 괴테는 예순둘의 나이로, 나폴레옹과 만날 정도로 큰 인지도와, 수많은 걸작들을 써와서 괴테의 불멸은 이미 그 무엇보다도 웅장할 것이라고 확정되어 있었다. 그런 괴테에게 스물 다섯살의 젊은 아가씨인 베티나가 접근한다. 괴테는 처음에는 베티나의 자신을 향한 모든 감정이 '불멸을 향한 욕망의 몸짓' 임을 모르고 모든 감정을 베티나의 '진심'으로 착각하며 친근하게 편지를 주고받곤 한다. 하지만 괴테의 연인이라는 불멸을 얻고 싶었던 베티나는 괴테가 자신에게 취하는 태도가 '사랑' 이 아닌 그저 '친구' 혹은 '제자'로 생각하는 것에 큰 불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베티나는, 오로지 불멸을 향한 세속적인 욕망에 젖어버린 채, 생각할 수 없는 계획을 꾸민다. 그러나 괴테는 베티나의 그 몸짓을 알아차리게 되고 늦게나마 베티나를 멀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예순둘의 나이로 불멸과 가까워진 삶을 살고 있던 괴테는, 결국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베티나'라는 존재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의 불멸에 빠져버리고 말게 된다. 괴테가 죽고 나자, 베티나는

지금까지 자신과 괴테가 주고받았던 모든 편지들 모으기 시작했고, 그 편지들을 모조리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꾸기 시작한다. 괴테가 베티나에게 '친애하는 친구에게'라고 쓴 문장은 '나의 소중한 이에게'

라고 바꿔 쓰었고, 친구의 우정을 뜻하는 말은 연인 간의 사랑을 뜻하는 말로 칠해버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서로 간의 사이에 늘 열정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편지의 날짜를 죄다 바꾸어 버리게 된다.(곧바로 답장을 했던것 처럼 보이기 위해) 그렇게 베티나는 1835년, [괴테와 한 어린 소녀의 서간집]이라는 책을 출간하게 되고, 베티나는 자신의 불멸이, 괴테와 편지를 주고받은 영원한 젊은 연인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먼 훗날 자신의 불멸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1929년, 베티나와 괴테가 주고받은 편지의 원본이 발견되게 되고 베티나의 불멸은 한순간에 한 없이

가벼운 우스꽝 스러운 불멸로 변하게 된다. "왜 그녀는 자신이 원본을 모두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제때 불살라버리지 않은 것일까?" 이는 베티나의 불멸을 향한 욕망이 컸었던 만큼, 괴테를 향한 존경과 진심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베티나는 늘 그 원본을 없애어야 함을 알고 있었음에도, 계속 하루하루 미루었고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너무 늦어버리기 마련이다. 밀란 쿤데라는 이런 베티나에게 한 문장을 선물한다.

"우리는 불멸을 생각하지만, 죽음과 함께 생각해야 함을 망각하는 것이다."

베티나는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저 베티나는 자신이 숨겨둔 원본이 영원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뿐일 것이다. 죽음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든 것은, 결국 자신의 불멸이 어떻게 변하든 아무런 관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밀란 쿤데라는 베티나를 헛된 욕망을 꿈꾼 세속적인 인물로 평가한다. 나 또한 어느 정도 욕망은 그러려니 하고 넘기겠지만 베티나의 너무 환상에 젖은 욕망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 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게되는 순간, 나의 불멸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명도 할수 없게 된다는것에서 조금의 무력

함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죽으면 다 끝이지 뭘 생각해."라고 간단하게 단정 짓곤 한다. 하지만 정말로 죽음이 닥쳐온 사람들은 유서를 쓰거나,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물건을 나눠주고 좀 더 좋은 묫자리를 찾곤 한다. 하지만 이런 '자신' 만을 위한 불멸 말고도, 한 번쯤은 "남의 기억에서 불멸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죽음을 준비하는 우리의 모든 모습은,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던

"불멸을 향한 욕망의 몸짓" 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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