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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by Jade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김영민 저)‘


이 책의 제목이 문득문득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뇌세포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다가 이따금씩 또렷해진달까. 약간의 빠른 심장박동과 함께. 아직 죽음으로 인한 큰 상실을 대면하지 않았음에도 내 마음 언저리엔 항상 죽음에 대한 불안이 안개처럼 퍼져있다. 그게 나의 부재가 될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남편과 약속한 게 하나 있다.

살면서 진짜 하고 싶은 건 하면서 살자고.

돈이 없다고, 시간이 안된다고,

아이가 어려서 힘들다고,

핑계 대지 말고 그냥 지금 해보자고.

우리가 100살까지 살지,

내년에, 5년 뒤에, 혹은 10년 뒤에 세상을 떠날지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 밖에 없는 사람처럼 살 수는 없어도

영원히 살 것처럼 모든 걸 미루지는 말자고.


어느 날 문득 ’죽음‘이 떠오르면,

조금 전까지 핏대를 세우며 아이를 혼내던

마음이 누그러든다.

더 많이 웃어줘야지,

더 많이 안아줘야지,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줘야지.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이 한없이 소중해진다.




요즘 읽고 있는 ‘음악소설집’에는, 사랑과 낭만이 가득할 것 같은 이름과 달리 죽음이 관통한다. 다섯 작품 중 세 개를 읽었을 뿐이지만 소설 속 화자들은 하나같이 자신 혹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경험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상실에 대처한다.


첫 번째 작품 ‘안녕이라 그랬어’에서는 부모의 죽음을 다룬다. 이 소설의 화자 김은미의 남자친구 헌수는 어릴 때부터 아주 긴 시간 동안 부모님의 병간호를 했고 그렇게 떠나보냈다. 은미가 헌수와 [러브 허츠] 들으며 가사 속에서 들리던 ‘안녕’이란 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아침, 은미는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리고 아주 오랜 간병 끝에 어머니를 떠나보낸다. 은미가 6인실 보호자용 침대에 혼자 덩그러니 누워 헌수의 말을 떠올리던 장면이 꽤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이제 와 헌수 말을 빌리자면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저 내 차례가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죽음에 대한 내 오래된 경계심과 불안을 꿰뚫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게 돼있다는 진실.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일 밖에는. 순서만 다를 뿐, 누구에게나 이별은 찾아온다. 소설 속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 삶만큼 죽음만큼 상투적인 게 또 어디 있다고. 그 ‘반복’의 무게에 머리 숙리는 게 결국 예의 아니던가.”




두 번째 소설은 ‘수면 위로‘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화자 은희는 더 이상 기진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적응하려 고군분투 중이다. 기진의 부재를 깨닫는 순간 호흡이 가빠와 호흡법을 검색하던 중 공황장애를 겪고 있으며 돈 한 푼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유주라는 사람의 동영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유주의 이전 영상 중 하나에서 놀랍게도 기진이 등장한다. 과거 영상에 담긴 영천의 한 중국집에서 오므라이스를 먹는 유주와 기진의 대화와 현재 영상을 보고 있는 은희의 기진에 대한 기억이 교차된다. 기진이 유주에게 자신이 느끼는 기시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내가 말하는 기시감과 신맛과 자살 충동이란 꼭 그런 느낌입니다. 시간여행자처럼 몇 번이고 다시 살았던 하루를 또 시작하는 듯한 느낌.
•••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내가 같은
하루를 몇 번이고 다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기진이 유주에게 말하고 있는 영상 아래로 이런 자막이 지나간다.


어떤 시간 여행자가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면,
거기에 자신이 놓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물이 날 정도로 인생이 뻔하고 지긋지긋하다면, 같은 하루를 몇 번이고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든다면, 우리는 뭘 해야만 할까요?
•••
찾기 위해서죠.
지금 이 순간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지금 여기에서 그걸 찾아야 해요.


기진은 시간여행자로서 자기가 지금 이곳에서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결국 찾아내지 못한 것 같다. ‘기시감과 신맛, 그리고 자살충동으로 이어지는 패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은희는 어떻게 됐을까? ’사방이 꽉 막힌 현실 속에서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그 현실에서 빠져나왔을까? 아마도.


그렇게 매일 아침마다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적어내려 갔다. 그게 진실이 맞다면, 나는 그걸 견뎌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그게 내게는 애도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세 번째 소설 ‘자장가’의 화자는 교통사고로 죽은 아이이다. 아이의 영혼은 자신의 장례식이 끝난 뒤 엄마를 따라나선다. 혹시라도 엄마가 잠 못 들까 봐, 자기 생각을 하며 밤새 눈물을 흘릴까 봐. 하지만 아이의 우려와 달리 엄마는 새근새근 아침까지 잠을 잤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엄마가 잠 못 이뤘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엄마가 새벽 내내
거실 소파에 앉아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으면. 그러면 내가 그 옆에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어줄 텐데. 엄마의 꿈속으로 들어가
내가 아직 여기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꿈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알지 못했다.


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을 했다. 단 하루, 아이의 생일이 되어서야 출근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의 생일상을 정성스럽게 차려주었다. 그리고 아이의 단골 가게이자 자신의 친구가 운영하는 분식집에 남은 음식을 싸갔다. 아이는 엄마를 따라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엄마가 우는 모습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그 애 꿈을 꾸고 싶어서 나는 잠을 자. 어떤 날은 종일 자기도 해. 그런데도 한 번도 꿈속에 나오질 않아. 그게 무서워.


아이는 주변을 맴돌다가 이 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지구본이라는 아이를 만났다. 그리고 엄마의 꿈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구본을 따라가 꿈속에 들어가는 법을 전수받는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발코니 건조대에 놓여있는 짝짝이 양말을 발견했다. 자신이 죽은 날 엄마와 나눠신었던 짝짝이 양말. 엄마는 매일 그 양말을 빨아 말리고 다음 날 다시 신고 출근했다. ‘마치 양말이 한 켤레밖에 없는 사람처럼.’ 죽은 아이의 관점에서 쓰인 글이다 보니 엄마의 감정과 행동은 매우 단편적으로, 그리고 정제되어 그려진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를 잃는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이 글은 그런 애끓는 슬픔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엄마는 변함없는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매일매일 짝짝이 양말을 빨아 널고 다시 신는 그 과정이 엄마에게는 애도의 방식이었을까? 꿈속에서나마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어 잠을 청하는 엄마의 모습이 담담히 그려질 뿐이다. 아이는 결국 엄마의 꿈속으로 들어간다. 자기의 무릎을 베고 잠든 엄마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나지막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죽은 자가 꿈을 통해 산자를 위로한다. 윤성희 작가의 다른 단편집 ‘날마다 만우절’에서도 서로 못다 한 진심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꿈이 자주 등장하곤 했다. 꿈은 만남의 공간이자 치유와 해방의 공간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에 흥미로운 복선이 하나 있다.

아이가 죽은 날, 하얀 눈이 펑펑 쏟아졌다.

국어시간에 선생님은 시 한 편을 낭송해 주셨고

누군가 응앙응앙 당나귀 울음소리를 흉내 내 몇몇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트럭이 아이에게 달려오는 순간, 응앙응앙, 아이는 어디 선가 들러오는 당나귀 울음소리를 들었다.

국어 선생님이 어떤 시를 낭송했는지는 나와있지 않았지만 나는 당연하게 백석의 시를 떠올렸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독서모임 회원 중 한 분은

아이가 죽는 순간에 왜 당나귀의 울음소리를 들은 건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게, 왜 백석의 시였을까?

곰곰이 백석의 시를 읽다 보니 갑자기 샤갈의 그림이 떠올랐다. 특정한 그림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이미지.

여자와 남자, 당나귀, 푸르고 흰 배경, 몽환적인 분위기. 샤갈의 그림에서 당나귀가 가지는 상징성을 찾아보다가 꿈과 무의식을 상징한다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묘하게 닮은 백석의 시와 샤갈의 그림 그리고 이 소설.

가늠할 수 조차 없는 큰 슬픔,

모든 게 비현실처럼 느껴지는 상황,

유일한 탈출구는 어쩌면 꿈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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