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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받아쓰기 해 봤어?

by Jade
엄마, 받아쓰기 해 봤어?


올해 초에 구입해서 아이에게 읽어줬던 책인데 아이가 무척 재밌어했다. 주인공 '바다'는 받아쓰기에서 처음으로 빵점을 받고, 엄마에게 혼나며 자신감을 잃는다. 엄마는 미안한 마음에 편지를 쓰지만, 맞춤법 실수를 하게 되고, 바다는 이를 빌미로 엄마에게 받아쓰기 시험을 제안한다. 엄마의 맞춤법이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우리 집 아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통쾌해했다. 주인공 ‘바다’에게 엄청 감정이입을 한 모양이었다. 받아쓰기로 혼낸 적은 없지만 그동안 종이접기, 줄넘기, 산수, 영어 등을 가르치며 구박을 좀 한 게 내심 찔렸다. 내 아이일수록 평정심을 유지하며 우아하게 가르치기가 쉽지 않다. 조바심과 불안에 눈이 멀어 아이를 호되게 다그치기 일쑤다. 이 책을 읽으며 아이는 엄마에게 짜릿한 복수를 한 듯 쾌감을 느꼈고, 나는 마음처럼 따라와 주지 않는 아이를 답답해하며 화를 내던 내 모습을 반성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아이는 아무런 맥락 없이 받아쓰기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기는 받아쓰기 시험을 보면 바다처럼 0점은 받지 않을 거라고, 적어도 50점은 받을 수 있다고 큰소리를 떵떵 쳐댔다.


2학기가 시작되고, 드디어 아이의 받아쓰기부심이 근거가 있는 건지, 그냥 허풍인 건지 가려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아이 담임 선생님은 매주 수요일에 받아쓰기 시험을 보겠노라 공지한 후 받아쓰기 연습문장을 예쁘게 출력해서 배부하셨다. 아이가 워낙 자신감을 드러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그래도 한 번 연습은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우리 아들 생애 최초 받아쓰기 시험을 실시했다! 살짝 긴장한 기색이 보이긴 했지만 자신만만 여유만만한 모습이었다. 학습지에 있는 1급 문장을 한 문장씩 또박또박 천천히 읽어주었다. 띄어쓰기 부분은 누가 들어도 “여기 띄어 써야 해요~”라고 느낄 수 있게 끊어 읽었다. 마침표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정성스럽게 찍는 아들의 모습이 아주 의젓했다. 아들이 자신감 있게 내민 답안지를 보는 순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조사란 조사는 왜 죄다 띄어놓은 건지, 문장의 종결어미도 모두 외로운 외딴섬을 만들어놓았다.


“몇 점이야?”

“몇 점이긴, 빵점이지. 푸하하하하”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가 봐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아이도 따라 웃었다.

“너 오늘 엄마랑 연습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학교에서 빵점 받아서 창피할 뻔했잖아. 그러니까 학습지 보고 한 번씩 따라 쓰도록 해.”

“어휴, 이걸 꼭 써야 돼?”라고 슬쩍 운을 뗐다가, 학교에서 창피를 당하고 싶진 않았는지 군말 없이 문장을 써 내려갔다. 보고 썼는데도 두 개나 틀렸지만 웃으면서 가볍게 지적하고 넘어갔다. 10점도 아니고 빵점이라니, 자기 자신이 제일 충격이 컸을 테니까.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다.

언제나 그랬듯, 아들을 꼬옥 안아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받아쓰기 빵점 받았지만 그래도 엄마는 너를 사랑해. 으흐흐흐흐“

이런, 웃음을 참는 데 실패했다.

“엄마~~ 왜 또 받아쓰기 얘기를 꺼내는 거야~~”

발끈하는 목소리 끝에 웃음이 배어있었다.

“엄마가 이거 비밀로 해줄까? 빵점 받은 거 말이야. 할아버지 할머니랑 아빠한테 얘기 안 할게. “

“좋아. 꼭 비밀 지켜야 된다! “

“알았어. 오늘 시험 본 종이도 버려버릴까? 아무도 모르게?”

“어! 버리자.”

“엄마가 진짜 말하고 싶은데 참는 거야. “

“K이모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창피하단 말이야. “

K이모는 같은 동네에 사는 내 친구이자, K의 딸은 아들의 친구이기도 하다.

“너 근데 수요일에 시험 보고 점수 낮은 친구들 놀리고 그러면 안 된다! 너도 빵점 받아서 창피하지? 친구들이 몰랐으면 좋겠지?“

“응. 근데 한 번은 점수 물어볼 수 있지 않아?”

“점수 얘기 안 해주면 더는 묻지 마. 괜히 알려고 하지 말라고.“

“알았어. 근데 말 안 해주면 시험 못 봤다는 뜻이잖아

“그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말고 속으로 집어넣어.”

“알았어.”

“이제 자자.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러고 5분 정도 지났을까?

“엄마, 나 빵 사줘!”

“갑자기 무슨 빵이야. 입 다물고 잠이나 자.”

“빵점 받았으니까 빵을 먹어야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목구멍으로 빵이 넘어가니?‘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여기서 아들의 마수에 걸려들면 분명 이십 분은 더 떠들다 잘 게 분명했다. 이럴 땐 무반응이 정답이다. 아들은 몇 분간 더 빵타령을 하다 잠이 들었다. 빵점 받아놓고 빵 사달라고 조르는 명랑하기 그지없는 아들 녀석. 빵 대신 꿀밤을 한 대 주고 싶다가도, 이내 지금은 건강하고 명랑한 걸로 충분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명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린이의 특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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