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답사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19일 아침, 커튼을 열며 햇빛 쨍한 동남아의 하늘을 기대했는데, 우리가 마주한 건 비를 잔뜩 머금은 듯한 먹구름이었다. 몸도 찌뿌둥한데, 날씨마저 나가고 싶은 마음을 사그라들게 했다. 그래도 오늘은 이 여행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 있었기에, 이불을 박차고 준비를 시작했다. 유치원 투어가 9시 40분에 잡혀있었다.
8시 30분쯤 S와 서둘러 아침을 먹으러 나섰다. 유치원 투어를 양해해 준 S에게 고마워서 대부분의 일정을 S의 결정에 맡겼다. 항상 여행 전에 빼곡히 계획을 세우는 편이었지만 이번엔 정말 유치원 투어 말고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나의 여행 메이트 S는 가서 결정하자는 주의였기 때문에 아침에 대충 S가 알아본 식당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S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동남아 휴양지 바이브를 기대했는데, 날씨는 물론 좁은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의 소음이 우리의 혼을 쏙 빼놓았다. 10년 전쯤 친구 H와 함께 갔던 호찌민에서의 첫날이 떠올랐다. 대로를 가득 메운 압도적인 스케일의 오토바이 부대에 기가 빨렸었다. 그래도 시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둘째 날부터는 그 오토바이 부대 사이를 유유히 가로질러 대로를 건너 다녔다. 이 또한 지나가리란 것을 알았지만, 아무래도 나 때문에 짱구를 선택한 S가 내내 신경이 쓰였다.
천만다행으로 숙소에서 5분 정도 걸었을 때 이 동네에서 유명한 Penny Lane을 발견했다. 푸릇푸릇한 정원 같은 이 식당을 보자마자 그냥 여기 가자고 한마음 한뜻으로 말했다. 아수라장 같은 도로에서 몇 걸음 들어왔을 뿐인데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었다. S의 표정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https://maps.app.goo.gl/zBq95wno4YzAKKr17?g_st=ic
음식은 엄청 맛있지는 않았지만 이 공간이 주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우리가 발리여행에서 바랐던 힐링과 휴식을 선물해 주었다.
9시 20분쯤 그랩을 불러서 유치원으로 이동했다. 유치원으로 가는 내내 이어지는 오토바이 행렬. 그리고 곳곳에서 진행되는 공사들. 멋진 카페와 식당, 옷가게들이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유치원 앞에 도착해서 보니, 우리 숙소가 있는 곳은 말 그대로 양반이었다. 양쪽 방향으로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나름의 흐름을 만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곳에 사진으로 봤던 그런 유치원이 있을까 싶었다.
https://maps.app.goo.gl/1pZj3TTm5gQ7gxw46?g_st=ic
신기하게도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자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운 정원이 짠! 하고 나타났다. 기저귀만 입은 채 뒤뚱거리며 물놀이를 하는 아가들, 그 뒤로 오리 두 마리가 뒤뚱뒤뚱 걸어갔다. 매니저가 동행하며 각 교실을 보여주었고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업받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시설은 정말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다만, 교실 안이 꽤 어두웠다. 이건 어쩌면 이 지역의 특성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발리의 많은 기관에서 강조하는 교육철학 중 하나가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공존이었으니까. 투어를 마치고 내가 눈여겨본 숙소도 둘러보았다.
https://maps.app.goo.gl/zKwodkcqMpa6xqieA?g_st=ic
오토바이 행렬에 압도되어 모두 둘러볼 엄두를 못 내고 가장 가까운 곳 한 곳만 가봤다. 골목 안으로 조금 들어왔을 뿐인데도 조용하고 숙소 건물도 깔끔해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주변을 더 둘러보지 않아도 괜찮겠냐는 S의 말에도, 그랩을 불러 우리 숙소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길이 더 막히는지 처음 우리가 왔던 길과는 다르게 크게 빙돌아서 20분 넘게 걸려 숙소에 도착했다. 행여 관광객인 우리에게 덤터기를 씌우려고 돌아간 게 아닐까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택시비는 비슷하게 나와서 도로 사정 때문에 돌아간 거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아침에 집을 나섰을 때만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유치원에 다녀오고 나서는, 여기가 우리 본거지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제야 주변 풍경도 눈에 들어왔다.
구글 지도에서 숙소 주변 마사지샵 중에 평점이 괜찮은 데를 골라 마사지를 받았다. 그래, 이 맛에 동남아를 오는 거지!
마사지를 받고 점심을 먹으며 천천히 유치원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발리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아이를 보내겠다고 99퍼센트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도로사정이 얼마나 안 좋은지, 숙소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진으로 오토바이가 가득한 도로를 봤을 때는 ‘동남아가 이렇지 뭐.’라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막상 그 소음 속에 파묻혀 보니, 아찔할만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과연 이곳에서 힐링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국룰’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을뿐더러 좋아하지도 않는다. 모두가 취향과 생각이 다른데 천편일률적으로 정답을 정해놓는 것에 대한 반발이랄까. 하지만 유치원 답사를 하며, 왜 사람들이 그렇게 ‘국룰’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국룰’을 따르면 평타는 치니까. 실패할 가능성을 줄여주니까! 인도네시아 여행카페에서 ‘아이와 발리 한 달 살기’의 국룰은 사누르지역이었고, 짱구는 한 달 살기 지역으로 가장 ‘비추’하는 곳이었다. 나는 다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론 ‘국룰’이 옳다는 것을. 그래도 짱구의 다른 곳은 괜찮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짱구에서 가장 유명한 유치원인 Alam Atelier Preschool Bali를 핀스비치클럽에 가는 길에 잠깐 둘러보았다.
https://maps.app.goo.gl/C9ZTASVq4teHaskR7?g_st=ic
확실히 이곳 도로는 좀 더 한적했다. 하지만 Alam Atelier를 방문한 날은 토요일 오후였기에, 장담할 수는 없었다. S는 유치원 옆 카페 직원에게 평일에도 통행량이 이 정도인지 물어보라고 독촉했다. 하지만 그냥 비치클럽이나 가자고 S를 잡아끌었다.
사실 도로사정보다 유치원에 대해 더 확신이 없었다. 시설도 좋았고 메일을 보낼 때마다 답변도 빠르고 소통이 잘 되었음에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정원에서 해맑게 뛰어노는 3-4세의 꼬마들에겐 너무나 좋은 환경 같았다. 하지만 교실에서 만났던 우리 아이 또래의 아이들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수업이 일과 중 한두 시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보육 중심이라, 자유 놀이 시간에 영어가 모국어인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교사 또는 친구들과 상호작용을 하지만 영어를 잘 못하거나 조용한 성격의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7세(만 6세)인 아이가 다니기에는 맞지 않는 옷 같달까? 한국에서 유치원을 다니는 나이니까 별 고민 없이 유치원만 알아봤었는데, 발리에서는 학기가 8월에 시작이라 우리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에 해당한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오히려 학교에 입학을 하면 정해진 커리큘럼이 있어서 그걸 따라가면 되니까 더 적응하기 쉽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Alam Atelier를 둘러봤을 때, 시설도 주변환경도 괜찮았음에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왔다. 학교도 숙소도 다시 알아봐야 한다. 마지막 날 우붓 택시투어를 가는 김에 우붓에서 유명한 학교 두 곳을 들려보자고 친구에게 양해를 구했다. 학교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으로 찾으면 되지만, 주변 환경을 확인하고 싶었다. 학교 근처에 도보로 다닐만한 괜찮은 숙소가 있는지, 아이 유치원 보내고 내가 조용히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들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발리 사전답사를 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이미 닥친 일이니까 어찌어찌 적응을 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모든 걸 알아봐야 함에도, 이번 답사를 통해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이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