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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거지’인가? 속물적 시선이 만든 조롱들

by Jade

개근이 왜 ‘조롱’이 되었을까


몇 년 전부터 ‘개근 거지’라는 말이 뉴스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떠돌기 시작했다. 성실함의 상징이던 ‘개근’이 왜 갑자기 조롱과 혐오의 표현이 되었을까? 학교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떻게 가난함의 증거가 되어버린 걸까?


이 표현의 탄생 배경은 단순하다. 여행을 목적으로 결석하는 아이들이 많아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결석 한 번 없이 학교에 다니는 소수의 아이들을 “돈이 없어서 여행도 못 가는 거지”라고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경제적 잣대로 사람을 등급 매기고, 가난한 이들에게 멸시와 수치심을 씌우는 사고가 곰팡이처럼 퍼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안 가는 것”도 이유가 다양하다


학기 중에 여행을 가지 않는 이유는 ‘돈’ 말고도 수도 없이 많다. 시간이 없을 수도 있고,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수업은 무조건 출석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을 수도 있고, 내 집 마련이나 노후 준비 등 다른 목표 때문에 지출을 조절하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꼭 ‘돈이 없어서’라는 편협한 이유를 들이대며 멸시하려 하는 걸까?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익숙한 기준으로 타인의 삶을 재단한다. 요즘에는 그 기준 중 가장 예리한 것이 ‘돈’이다. 학기중에 여행을 가지 않는 아이들을 아주 쉽게, 그리고 편협하게 단정짓는다.

‘돈이 없으니까 못 가겠지.’

한 사람의 선택과 취향과 시간, 신념 같은 것들은 너무 복잡하고 느리기 때문에, 여기엔 자리를 내어줄 공간이 없다. 경제적 우위라는 단순한 선 하나로 사람들은 서로를 줄 세운다. 그리고 줄의 맨 뒤에 누군가를 세우기 위해 조롱이라는 도구를 만들어낸다. 결국 내가 위에 서 있고 싶어 하는 뒤틀린 욕망, 경제적 우위를 통해 우월감을 얻으려는 심리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설령 돈이 없어서 여행을 가지 않는다고 해도, 그게 왜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그건 개인의 선택일 뿐이고, 남에게 피해 주는 일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 사회에 퍼진 속물적 시선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자신보다 금전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이들을 너무 쉽게 조롱한다. 자가가 아니면 비웃고, 외제차가 아니면 조롱한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문제라기보다 사회 전반에 이런 왜곡된 시선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개근 거지’ 같은 혐오 표현이 필터 없이 유통된다.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말이 과하지 않다.


이걸 더 확실하게 느낀 건, 혐오 표현에 대응하는 사람들조차 비슷한 방식으로 혐오를 되돌려준다는 점이다. 유튜브의 한 교육 채널에서 진행자가 ‘개근 거지’라는 표현을 지적하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는데, 그 영상의 댓글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진짜 부자는 다 방학에 여행 다녀요. 돈 없는 사람들만 방학이 성수기라 비싸서 못 가고 학기 중에 가는 거죠.”


한두 개가 아니라 상당수의 댓글이 이와 비슷했다.

솔직히 말해, 이게 ‘개근 거지’라는 표현과 뭐가 다른가? 혐오 표현을 비판하면서 동일한 방식의 혐오를 되돌려주는 그 위선에 경악했다.


혐오에 맞서는 방법은 단순하다

혐오에는 혐오로 대응하는 게 아니다. 그 표현이 잘못됐고, 인격을 모욕하는 것이기에 쓰면 안 된다고 단순하고 명확하게 말하면 된다. 혐오에 맞서 또 다른 혐오를 만들어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이 또 있을까?


아마 댓글을 단 사람들은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보다 돈도 없는 것들이 학기 중에 싸게 여행 다니는 주제에, 뭘 안다고 개근 거지라고 비하해?”

이런 식의 마음이 깔려 있으니, 결국 “난 돈이 많아서 성수기에 다닌다고!”이라는 터무니없는 자기 과시로 귀결된다.


하지만 핵심은 나나 상대방이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혐오 표현을 사용하는 태도 자체가 문제다.

‘개근 거지’를 쓰는 사람이나, 그 표현을 비난하면서 또 다른 방식으로 남을 조롱하는 사람이나—둘 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잃은 속물일 뿐이다.


돈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속물적 태도 자체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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