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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기술

by Jade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랑스러운 내 새끼가

원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쑥쑥 자라나는 몸만큼 머리도 컸는지

엄마 아빠가 훈계를 할 때마다 호락호락 넘어가질 않는다.

바락바락 말대꾸를 하며 대들거나

침묵으로 일관하며 독기 어린 눈빛을 내뿜기도 한다.

아직 가르칠 게 많은데

매번 아들의 반항을 마주하다 보니

분노의 감정이 쌓이고 쌓여 쉽게 화가 가라앉지 않는 날도 있다.

설 연휴를 보내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제천여행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고모할머니가 놀러 오셨다. 다음 날 시골로 내려가시기 전에 다 같이 나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들이 얄밉게 말했다.

"난 안 갈 거야. 혼자 집에 있을래."

"다 같이 나가는 거니까 너도 가야지.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오자."

"싫은데. 내가 왜 가야 해? 난 절대 안 갈 거야."


이미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등에 업고 버릇없이 굴고 미운 소리를 해대서 몇 차례 혼낸 터였다. 말재간이 좋은 아이라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이의 맹랑한 소리에도 그저 즐거워하며 귀여워했다. 그러다 기고만장해져서 선을 넘는 말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말을 잘하는 복주머니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그걸 잘 사용해야지 자꾸 깐족대고 얄미운 소리를 하는데 쓰면 안 된다고 몇 번을 타일렀다. 같은 말이어도 어떤 태도로 전달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말해야 한다고 계속 얘기했다. 아무리 외동이라지만,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몇 번을 혼내도 자기밖에 몰랐다. 아직 어려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보고만 있기엔 커서도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걱정과 불안은 화를 돋우는 불쏘시개가 되어 순식간에 화가 들끓게 했다. 마치 그것이 내가 아이에게 화를 내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처럼.


"네가 진짜 왕이라도 되는 줄 알아? 왜 네 마음대로 하려고 해? 다 같이 나가기로 했으면 따라 나가야지. 네가 혼자 집에 있을 수나 있어? 아직 혼자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혼자 집에 있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있어."

"엄마도 엄마 맘대로 하잖아."

"다 같이 나가기로 한 거잖아. 이게 엄마 맘대로 하는 거야? 정말 엄마 맘대로 해봐? 너 하고 싶은 거 내일부터 다 끊으면 되지? TV시간도 없애고 레고 카페도 안 갈 거야. 오늘 안 따라나서면 네가 좋아하는 것도 다 뺄 줄 알아."


남편과 어른들만 내보내고 아들과 집에 남아있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일부터 아들이 잘 못했다고 할 때까지 TV, 레고카페, 보드게임 등은 일체 해주지 않을 심산이었다. 어떻게든 제멋대로 하려는 고집을 꺾어놓고 싶었다.

그 사이 남편이 아이 방에 들어가 아이와 얘기를 했다. 삼십여분이 지난 후 같이 나가기로 했다며 나갈 준비를 하는 게 아닌가.

극적인 반전에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마음에 화가 덩어리처럼 뭉쳐있어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가서 커피와 디저트를 먹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안제 그랬냐는 듯 다가와 말을 걸고 내 옷자락을 잡았지만 아이를 쳐다보지도, 손을 내밀어 잡아주지도 않았다.

"다음에 또 다 같이 나가는데 안 나간다고 할 거야?"

라고 물었더니

"그건 대답할 수 없어. 안 나가고 싶을 수도 있잖아."

다시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아이와 함께 어른들을 터미널에 모셔다 드리는 동안 혼자 걸었다. 한 바퀴를 다 돌아도 개운해지지 않았다. 응어리가 풀리기는커녕 곱씹을수록 점점 더 커졌다.

벌써부터 고집부리고 말대꾸하는 아들에게 화가 나는 한편 윽박지르며 혼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는 내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내 자신이 추하다. 볼품없어 견딜 수가 없다. 엉켜버린 실타래를 어떻게 풀아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계속 아이를 외면할 수도, 이대로 아무 일 없던 듯이 넘어갈 수도 없었다. 여전히 마음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집에 돌아가야만 했다. 엄마에게 단숨에 달려오는 아들과 달리, 나는 여전히 실타래에 엉켜 허우적거렸다. 그 모습을 들키기 싫어 아들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했다. 혼자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아들이 따라 들어왔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아들을 불러 옆에 앉혔다.

"다음에도 또 다 같이 나가야 하는 데 안 가겠다고 고집부릴 거야?"

"12살 형아 되면 그때는 혼자 있을 거야. 엄마가 그 정도 나이는 돼야 혼자 있을 수 있다며."

"중학생은 돼야지. 그땐 인정해 줄게."

"중학교 입학하기 하루 전부터 해줘."

"알았어. 하루 전날부터."


엄마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싫어서 굳이 하루 전날부터라고 되받아치는 아들. 아이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기로 했다. 사실은 아들이 나의 자존심을 위해 져 준 것이다. 사랑하는 엄마가 다시 자기를 바라보고 웃어주길 바라며. 엄마가 되고 종종 나의 밑바닥을 마주한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내가 다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하고 괴롭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건, 친절과 배려만 있으면 가능했다.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그런데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선 그 이상이 필요하다. 단호함과 엄격함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라는 마음으로 넘겼다가는 나중에 큰 탈이 날 수도 있다. 그래서 고달프다. 엄마는 아이에게 싫은 소리, 모진 소리도 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을 현명하게 다룰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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