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아들은 10월부터 매주 한 편 이상 일기를 쓰는 숙제를 시작했다. 방학 숙제로 일기 쓰기를 해본 동년배라면 모두 알 것이다. 일기는 자고로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뤘다가 써야 제맛이라는 것을. 이건 세대를 뛰어넘는 본능인 듯하다. 아들 역시 미루고 미루다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일기장을 펼치곤 한다.
일기를 쓰기 전, 어떤 소재로 무슨 내용을 담을지 아이와 짧게 이야기를 나눈다. 다 쓴 아이가 먼저 일기장을 가져올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조심스레 읽어봐도 되냐고 묻는다. 가끔 묘사가 좋거나 멋진 표현이 있으면 칭찬을 건네기도 하지만, 대개는 별말 없이 돌려준다. 특히 엉망진창인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애써 외면한다. 일기의 목적은 결국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 있기에, 과한 칭찬도 불필요한 지적도 최소화하려 노력한다.
이번 태국 여행에도 어김없이 일기장을 챙겨왔다. 주말마다 한 편씩, 오늘은 갓 쓰여진 따끈한 일기가 올라왔다.
‘도이인타논 국립공원’과 ‘몽족 시장’은 내가 따로 적어준 걸 보고 쓴 것이다. 사실 트레킹이 하이라이트인 투어였는데, 아들의 일기에는 귀여운 고양이들과의 추억만 가득하다.
아이가 일기를 쓰는 동안, 나도 침대에 기대앉아 블로그 포스팅을 작성했다. 일기를 다 쓴 아들이 심심한지 내 주변을 기웃거리다 찰싹 달라붙어 말했다.
“나도 엄마 일기에다가 엄마가 쓰라는 거 쓰면 안 돼?”
자기 일기는 그렇게 쓰기 귀찮아하면서 남의 일기는 왜 이렇게 쓰고 싶어 하는 걸까. 아들은 내가 블로그에 글을 쓰는 행위를 일기를 쓰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내 블로그의 정체성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지만 내가 좋아서 쓰는 여행 TMI’**이기 때문이다.
내 포스팅은 구구절절하고 지나치게 사적이며 두서없이 장황하다.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라곤 없는, 말 그대로 ‘혼자 떠드는 일기’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조회수는 높아도 ‘좋아요’는 가뭄에 콩 나듯 달린다. 정보를 얻으러 왔다가 질려서 나가는 이들이 태반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수요 없는 기록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결국 기록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난 후 기록에 대한 욕구가 생겼다. 내 기록이 훗날 아이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 동시에 엄마로만 남고 싶지 않은 자아의 발버둥이었다. 나를 잃고 싶지 않아서, 혹은 내가 너무 빨리 아이 곁을 떠나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주지 못할까 봐 겁이 나서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 쓰다 보니 나의 연약함과 욕망,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엄마로서의 삶을 기록했지만, 결국 내 본질에 더 가까워지는 과정이었다.
아이가 6살이 될 때까지 쓴 글들은 지극히 사적이고 감정적이라 여전히 블로그 비공개 글로 남아있다.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생각이 정리되고 내면에 단단한 중심이 생기면서 비로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전히 자기 고백적인 글이지만, 이제는 그 기록이 타인에게도 의미 있는 시각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길 희망하며 쓴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엄마가 반응이 없자, 아이는 갑자기 자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엄마 일기 쓰니까 나도 내 휴대폰에 일기 써야지. 엄마! 나 지금까지 쓴 게 33편이나 돼!”
혼자 중얼거리며 메모장에 글을 써 내려가는 모습에 내심 대견했다. 2024년 발리 여행 때 물려준 휴대폰에는 메모와 지도, 계산기 앱만 깔아두었다. 그때도 내가 블로그 포스팅을 작성하는 모습을 보더니 메모장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종이 일기장은 귀찮아하면서 휴대폰에는 언제 저렇게 많은 글을 쌓아둔 것일까.
방금 종이 일기장에 쓴 내용을 굳이 휴대폰에 다시 적었다. 그런데 놀랍개도 문장 연결이 훨씬 매끄러워졌다.
잘 시간이라 해도 하나만 더 쓰겠다며 고집을 부린다. 내 포스팅 카테고리인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보더니, 본인도 ‘태국 한 달 살기’라는 제목으로 새 글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했던 투어를 세어보더니 내일은 무려 9개나 더 써야 한다며 TV 시간까지 포기하겠단다.
엄마가 글을 쓰니 아이도 덩달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블로그든 브런치든 내가 계속해서 글을 써야만 하는 새로운 이유가 생겼다. 아울러 아이가 왜 집에서 책을 읽지 않았는지도 깨달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이가 보는 앞에서 다시 필사를 시작해야겠다. 결국 아이는 부모의 말이 아니라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