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의 자유로운 여행자

by Jade

오늘 드디어 영어 캠프가 시작되었다. 아들을 보내고 나니 드디어 기다리던 자유 시간이 찾아왔다. 어제 밤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혼자 무엇을 할지 꼼꼼히 계획을 세웠다. 너무 기대하는 티를 내면 아들이 서운해할까 봐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녀석은 이미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나는 영어 공부하느라 힘든데, 엄마는 혼자 카페 가서 논다 이거지?”

아들의 귀여운 질투에 나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너는 수업 끝나고 재밌는 체험 많이 하잖아. 그리고 엄마한테 커피는 약이야, 약. 안 먹으면 엄마 포악해지는 거 알지?”

캠프 차량에 아들을 태워 보내자마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와 짐을 챙겼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책 한 권과 다이어리를 에코백에 집어넣었다. 구글 맵에 저장해 둔 수많은 카페 중 오늘의 목적지는 창모이(Chang Moi) 지역. 올드타운 타패게이트 근처인 이곳은 최근 뜨기 시작한 핫플레이스라는 소문을 들었다. 이미 익숙한 올드타운이나 취향에 조금 어긋났던 님만해민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을지 궁금했다. 코끼리 바지에 민소매 티셔츠, 에코백과 선글라스까지. 오늘의 추구미는 치앙마이의 자유로운 여행자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나갈 차례!


Brewginning Coffee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직감했다. ‘아, 여긴 아니다.’ 적어도 독서와 필사를 즐길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카페 안에는 앉아 있는 사람보다 카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SNS에서 소문난 포토존인 모양이었다.

빠르게 플랜 B를 가동했다. 다행히 도보 2분 거리에 저장해 둔 다른 카페가 있었다. 이름부터 독서와 필사에 찰떡인 곳, 레어 파인즈 북스토어 앤 카페(Rare Finds Bookstore & Cafe)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빈티지한 인테리어와 1990년대 후반 라디오에서 흐르던 익숙한 팝송들. 무엇보다 직원이 무척 친절했다. 커피값 ‘80바트’라는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내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해주었다. 그 순간 확신했다. 찾았다, 나의 아지트!

1층의 어수선함을 피해 2층으로 올라가니 아늑한 소파와 작은 테이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빳빳한 책 표지를 넘겼다.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며 읽고, 다시 한 문장씩 다이어리에 옮겨 적었다. 일부러 ‘슬로우 리딩’을 하려고 챙겨온 영어 원서 <I May Be Wrong>의 내용은 카페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느림의 미학이 가장 잘 어울리는 도시, 치앙마이에서 여유를 만끽하던 그때였다.


“Excuse me, can I sit here?”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한 외국인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장기 배낭여행자의 아우라가 물씬 풍기는 그녀였다. 흔쾌히 자리를 내주었지만, 이내 작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둔 어색함이 밀려왔다.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말을 걸고 싶은 호기심 사이에서 고민하던 찰나, 마침 직원이 내 커피를 가져왔다. 나는 커피 한 모금으로 용기를 내어 스몰 토크를 시작했다.


“얼마 동안 치앙마이에 머물렀나요?” 여행지에서 가장 가볍게 던질 수 있는 질문으로 물꼬를 텄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태국 남부 섬들을 거쳐 빠이로 갈 예정이었으나, 스쿠터 사고로 병원 신진료를 받느라 3주째 치앙마이에 발이 묶여 있다고 했다.

흥미로운 건 그녀 역시 처음에 들렀던 ‘Brewginning Coffee’에서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님을 직감하고 이곳으로 도망치듯 왔다는 점이었다. "거긴 왜 그렇게 사진 찍는 사람이 많나요?"라는 그녀의 물음에, SNS와 거리가 먼 40대 아줌마인 내가 알 턱이 없었지만,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거리감은 좁혀졌다.

독일에서 편도 티켓으로 왔다는 그녀는 라오스, 베트남, 발리를 거쳐 돈이 떨어지면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발리에서 정착하려는 남자친구와의 미래, 그리고 가족과 가까운 유럽에 정착하고 싶은 소망까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였지만 내가 젊었을 때 꿈꾸던 삶이라고 했더니 흔쾌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는 가족과 직업 때문에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 수밖에 없다는 나의 말에 그녀는 다정하게 대꾸했다.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잖아요. 아이를 키우고 가족과 함께하는 삶도 충분히 멋져요.”


그녀와의 대화는 며칠 전 도이인타논 투어에서 만난 노르웨이 친구를 떠올리게 했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유가 좋아 혼자 여행하지만, 가끔은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누군가와 이 순간을 공유하고 싶다던 그녀. 젊음과 낭만이 가득한 그녀들의 인생 페이지를 보며 나는 묘한 이중성을 느꼈다.

내 몸집만 한 배낭을 메고 호스텔 이층 침대에서 잠을 자며 ‘리얼 트래블러’가 된 기분에 취했던 젊은 날의 내가 그립기도 했고, 동시에 지금 가족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추억을 함께 나누는 이 시간도 축복처럼 느껴졌다. 인생은 언제나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얼굴을 어떤 태도로 대할지는 결국 나의 몫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추구하는 여행의 색깔이 분명해졌다. 관광도, 미식도 아닌 바로 ‘관계’다. 함께 여행하는 가족과 의미 있는 감정을 나누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 지난 여행을 떠올리면 장소보다 그곳에서 만난 얼굴들이 먼저 스쳐 지나간다. 노르웨이에서 온 그녀도, 오늘 만난 독일 친구도 내 옆에 잠시 머물다 갔을 뿐이지만, 내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물해 준 귀한 인연이었다.





일주일 뒤 다시 찾은 레어 파인즈 북스토어 앤 카페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눈이 마주치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Rala?”

이내 그녀가 환한 미소로 응답했다.

“Jade?”

그녀는 그 때처럼 내 앞에 있는 소파에 와서 앉았다.

신기하고 반가웠다.

이 곳이 그녀의 단골 까페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한 번은 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녀가 치앙마이를 떠나기 전 날 다시 조우하게 될 줄이야.

우리는 똑같은 자리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했다. 인종도 나이도 많이 다르지만 우리의 영혼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의 눈빛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길 위에서 두 번이나 우연히 만난 인연은 충분히 낭만적이었고, 그건 그대로 남겨두는 게 더 아름다웠다. 그녀는 자신의 다이어리를 보여주며 지난 번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기록했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SNS계정을 묻는 대신 내 다이어리에 작별 인사를 적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녀의 일기장에 기록될 것이다. 우리의 일기장이 낡고 빛바래 질수록 기억도 희미해지겠지만, 잘 여물고 숙성된 오래된 것은 언제나 깊은 여운을 남기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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