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번 번호표를 주머니에 넣고 대기석에 앉았다. 오후 한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카오쏘이 님만' 앞에는 어림잡아 서른 명도 넘는 사람들이 나처럼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번호가 불려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빈자리는 금세 새로운 번호표를 받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카오쏘이라… 코코넛 밀크가 들어가는 매콤한 카레 국물에 노란빛이 도는 칼국수 굵기의 계란면, 그리고 그 면을 짧게 잘라 튀긴 토핑이 올라가는 음식이다. 태국 북부 란나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라 치앙마이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하는 메뉴로 꼽힌다.
무슨 맛일까? 얼마나 맛있을까?
안타깝게도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나 설렘은 없었다. 코코넛 밀크가 들어간 달짝지근한 그 맛을 평소 느글느글하다고 느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내 입맛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직감하면서도 기어이 찾아와 번호표까지 받아 쥐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싫어하더라도 직접 먹어보고 싫어하겠다는, 적어도 선입견 따위로 판단하지는 않겠다는 나만의 고집이었다.
‘밥 먹듯이’라는 표현처럼 밥을 먹는 일은 매일 우리가 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인생에서 이보다 더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이 있을까 싶다. 이렇듯 그냥 밥 한 끼 먹는 건데 내가 너무 비장한 건가?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지만, 별로 좋아할 것 같지도 않은 이 음식을 위해 30분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그것 말고는 딱히 찾지 못하겠다. 누구도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건만, 혼자 이유를 찾느라 골몰하는 사이 내 순서가 다가왔다.
요즘은 이렇게 멍하니 기다리는 시간에 스마트폰 대신 생각을 적는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기다림의 고통이 훨씬 줄어들었다. 머릿속에 떠도는 얽히고설킨 생각의 실타래 중 한 가닥을 붙잡고 살살 풀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어떨 때는 그 생각의 줄기를 놓치지 않으려 밥을 먹으면서도, 캠프에서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정신이 온통 그곳에 가 있기도 한다.
“엄마? 엄마? 엄마!”
아들이 내 팔을 잡아 흔들면 그제서야 아쉬움을 머금고 현실로 돌아온다. 다행히 지금은 신경 써야 할 아들이 옆에 없어, 주문을 하고 나서도 계속 생각의 실타래를 풀 수 있었다.
달달한 타이 밀크티가 제일 먼저 나왔다. 단맛 나는 주스나 커피를 즐기지 않는데도 타이 밀크티는 태국 음식을 먹을 때면 늘 생각난다. 짜고 매콤한 음식과 궁합이 좋기 때문이다. 이곳 타이 밀크티는 그중에서도 손꼽히게 맛이 있어, 한 입 머금는 순간 “음~!” 소리와 함께 눈이 번쩍 떠졌다.
곧이어 닭다리가 들어간 ‘카오쏘이 까이’가 나왔다. 주황색 국물에 노란색 면과 고명이 예쁘게 올려져 있었다. 국물을 한 입 떠먹어 봤다. 역시, 내가 상상하던 바로 그 맛이었다. 면을 건져 먹었다. 이럴 수가, 어떻게 면에서 단맛이 나지? 이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 닭고기를 맛보았다. 국물의 매콤함만 적당히 배어 있어 담백하고 맛있었다. 닭다리를 깨끗하게 해치우고, 면은 깨작깨작 건져 먹었다. 느글느글하다 싶을 때마다 시원한 타이 밀크티로 입가심을 했다.
계산을 하고 나오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입맛에 맞지도 않는 음식을 먹어놓고 드는 감정치고는 참 아이러니했다. 마치 오랫동안 미뤄둔 숙제를 해결한 기분이랄까.
나에게 이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도전이었다. 선입견과 익숙함으로 무뎌진 혀끝의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는 일.
미식가는 아니지만 이런 도전은 천천히 흘러가는 게으른 여행자의 삶에 짜릿한 자극을 준다. 내 입에 맛이 있고 없고는 부수적인 문제다. 바쁜 일상 속에서는 효율을 핑계로 늘 안전한 선택만을 한다. 좋아하지 않을 걸 알면서, 혹은 실패할 걸 알면서 도전하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다. 그게 음식이든 일이든 간에.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즐거움, 혹은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안전함 대신 기꺼이 낯선 불편함을 선택하는 것. 무딘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는 그 경험은, 여행이 끝난 뒤에도 우리가 쳇바퀴 같은 삶을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어줄 테니까. 이 여행이 끝나기 전,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오답지를 만들어낼지 은근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