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ay be wrong

불안이라는 관성과 유연함이라는 용기

by Jade

아침에 카페에 가려고 그랩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다. 그랩 배달 기사가 오토바이 앞자리에 두 살배기 아이를 태우고 앉아 있었다. 아내가 물건을 호텔 프론트에 맡기고 나오는 사이 아이와 놀아주는 아빠에게서,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은 듯한 행복한 미소를 보았다. 그건 행복의 표상 그 자체 같았다.

순간 나는 생각했다.

‘돈이 불행의 씨앗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가난이 꼭 불행의 동의어일까? 정말 그럴까? 명품 백을 메고 고급 리조트에 머무는 사람들 중 몇 명이 저런 행복 순도 100%의 미소를 얼굴 가득 짓고 있을까?’

가난을 미화할 생각은 없다. 나 역시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 일을 하고 머리를 굴리며, 투자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매일 밤 주식 계좌를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물질적 여유가 있었기에 이곳 치앙마이에서 한량처럼 게으른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난을 비하하고 부유한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거라는 옹졸한 인식에 대해서는 몽니를 부려보고 싶다.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내가 마주친 그들의 모습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사실 돈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말하려는 건 아니다. 어느 날 내가 가난한 행색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본다면, 나는 분명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 돈이 있어야 가족도 지킬 수 있어. 행복하려면 돈이 필요해.’

누군가는 줏대 없는 사람이라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유연함이라 부르고 싶다. 인생이라는 굴곡진 길을 완주하는 데 한 가지 방법만이 정답일 수는 없다. 골짜기를 지나는지, 강을 건너는지, 사막을 횡단하는지에 따라 다른 유연함이 필요하다.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삶은 편안함과 소속감을 준다. 모두가 한 방향을 향해 같은 방법과 속도로 달려간다. 아무리 우리가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살았던 민족이라 해도, 우리는 엄연히 서로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고유하고 개별적인 존재들이다. 결국, 우리는 남남이다. 일상에서는 이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다. 쉬는 시간이 생기면 편안한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며 맥주 한 캔 마시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극락이 어디 있으랴. 어쩌면 질문 따위는 사치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익숙한 장소와 인간관계를 떠나지 않는 한, 삶에 큰 폭풍우가 몰아치지 않는 한, 이 질문을 마음에 품기란 쉽지 않다.

“정말 그럴까?”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 아무 생각 없이 성공 공식이라 믿고 따라 했던 방식들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이 가급적 모두에게 일찍 찾아오기를 바란다.


스물두 살 무렵, 나는 처음으로 이 질문과 마주했다. 당시 나는 잉글랜드 요크셔 지방에 있는 한 장애인 커뮤니티에 막 도착한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전 세계에서 온 봉사자들을 만났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자마자 온 친구들도 많았다. 나는 그곳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6개월 뒤 우리 커뮤니티에 대학생이 3명으로 늘었는데, 모두 한국인이었다. 그건 내 가치관에 일종의 균열을 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명한 대학교에 들어가야만 성공한 삶이라는 공식에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 순간이었다.

1년 뒤 엘리는 독일로 돌아가 농장에 취직했고, 요한나는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우겠다고 했다. 스페인에서 온 글라리사는 남자친구를 따라 네덜란드로 떠났다. 인생의 길목마다 명확한 목표를 정해두고, 통과 여부에 따라 승자와 패자로 낙인찍히는 삶이 보편적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는 물 흐르듯 자신의 열정을 따라 옮겨 다니는 삶도 있었다.

나도 새로운 삶의 방정식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1년을 더 머물며 자격증을 취득할 생각으로 부모님 허락까지 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 1년을 채우지 못했다. 되려 쫓기듯 한국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향수병과 함께, 여기에 더 있다가는 한국의 친구들에 비해 뒤처질 거라는 공포가 나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오긴 했지만, 견고하게 굳어진 삶의 관성 앞에서는 무력했다.


어느덧 17년이 흘렀다. 허겁지겁 돌아왔지만 나는 2년 뒤에야 시험에 합격했다. 마흔을 앞둔 지금 돌이켜보면 한 두 해 늦고 빠른 건 삶에 그리 큰 차이를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그 시절 조금 더 용기를 내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았다. 당시 나와 비슷한 코스로 미국에 갔던 후배는 그곳에서 2년을 채우고 돌아와, 졸업하자마자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가 떠나기 전 술자리에서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네가 정말 부러워. 그리고 끝까지 너의 길을 가는 그 용기를 정말 존경해.”


그녀를 향한 찬사는 도망치듯 돌아왔던 나의 비겁함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이었지만, 이제는 그 과거를 보내주어야 할 때임을 안다.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가 알고 있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일 수도 있기에 두려움과 저항이 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똑같은 성공 공식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번 생긴 균열은 없어지지 않는다. 조금씩 틈을 벌리며 지속적으로 내 삶에 관여한다.

평범하게 사는 것처럼 보여도 어느 순간 마음에는 혁명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두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할 때, 마음속 근육들이 울끈불끈 움직이며 불편함을 느낀다. “정말 그럴까?” 하고 되묻는 순간들이 늘어난다. 어느 순간 뒤처진다는 불안함도 잦아든다. 대신 내 속도에 맞게, 내 방식대로 가고 있다는 만족감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종종 생각한다.


“I may be wron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실패할 줄 알면서도 기어이, 카오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