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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Apr 03. 2024

Walking Diary4.

2024.04.03.


이세계-낭만젊음사랑


몇 년 만에 하이힐을 신었다.

작은 키에 욕심을 부려

긴 원피스에 더 긴 트렌치코트를 입었더니

단화를 신었다간 옷에 파묻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될 것 같았다.

발이 쪼여오는 느낌이 불편했다.

오래 걸었다간 발 뒤꿈치에 상처가 날 게 뻔했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데

비가 온다.

우산을 챙기긴 했지만 잠시 머뭇거렸다.

버스를 타야 하나? 하이힐도 신었는데…


이제 곧 마을버스가 오려는지

정류장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노란 버스가 보였다.

조금 빨리 걸으면 버스를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좀처럼 발걸음이 빨라지지 않았다.

똑같은 속도로 걸으며,

줄 맨 마지막 사람이 버스 뒷문으로 올라타

몸을 구겨 넣는 것을 지켜봤다.

버스는 미련 없이 떠났다.


선택에 대해 생각했다.

뻔히 고생스러울걸 알면서도

비합리적인 걸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할 때가 있다.

사실 나는 그런 경우가 꽤 많다.

오늘처럼 버스를 탈지 말지 결정하는

사소한 선택부터

인생의 방향을 바꿀 아주 중요한 선택까지도.


열두 살부터 큰아버지댁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이가 너무 아파 병원을 가야 하는데

큰어머니도 큰아버지도 너무 바쁘셨다.

동네 치과를 혼자 찾아가 치료를 받았다.

학원도 스스로 알아봐서 등록했다.

일상의 모든 결정을 혼자 내리는 게 익숙했다.

그래서일까?

잘못된 결정으로 인한 결과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살면서 실수도 하는 거지,

다음에 잘하면 되지.


금세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내 선택을 누군가가 가로막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침묵으로 반항을 했다.

커다란 바위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육아를 하며 가장 힘들었던 건 사실 이 부분이었다.

아이가 내 삶을 통제한다는 느낌.

하지만 엄마로서 나는 그 통제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크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통제하려 했고

상대방에게 통제받는 걸 싫어했다.

영락없는 내 새끼였다.


인생에서 두 번 정도 큰 결정을 내렸다.

어찌 보면 비이성적이고 지극히 감정적인 선택이었다.


대학교 입학 원서를 쓸 때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쯤 교직으로 진로를 정했다.

친구들이 나한테 고민을 털어놓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에 용기를 얻었다.

친구들이 모르는 걸 물어보면 열정적으로 알려줬다.

그게 꽤 재밌었다.

서울에 있는 사범대를 하나 쓰고,

불합격을 대비해

더 합격 가능성이 높은 지방교대를 하나 쓰기로 했다.

부모님은 당연히 내가 전주교대를 쓸거라 생각했는데

엉뚱하게 춘천교대를 쓴다고 하니 충격에 빼지셨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춘천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좁고 답답한 전주를 벗어나고 싶은데

서울교대나 경인교대는 자칫 떨어질 거 같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생각에 서울에서 가장 가깝게 여겨진

춘천교대를 썼던 것이다.

얼마나 비이성적인 판단인가!

그런데 아버지는 다른 포인트에서 무척 화가 나셨다.

내가 가족 친척들이 모여있는 전주를 떠나

아무도 없는 춘천으로 간다고 한 걸 두고


‘가족도 다 필요 없고 혼자 살 거야 ‘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신 듯했다.

어쩌면 첫 번째 비이성적인 결정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이 사건은 금세 해결되었다.

불같이 화를 내는 아버지의 뜻을 꺽지 못하고

결국 전주교대를 지원했다.

그리고 다행히 1 지망에 합격했다.

문제는 전주교대도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친척들의 압박이 들어왔다.


집안 형편을 알지 않느냐,

전주에서 학교 다니면 생활비도 덜 들고

학비도 훨씬 저렴하지 않냐,

사범대는 임용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어려운데

교대 가면 쉽게 붙지 않냐…


당시 초등임용시험은 열 곳 남짓한 교대 졸업생 또는 몇 개 안 되는 초등교육과 학생들만 응시를 해서 전주 교대는 임용 합격률이 70% 정도였다.

사범대는 전국에 무수히 많았을 뿐만 아니라 교직이수와 교육대학원을 통해 교원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들이 모두 응시할 수 있어서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

당시 공부는 자신 있던 터라 경쟁률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집안 형편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등록을 결정하기 전 아버지에게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아빠가 사범대 보내기 힘들다고 하면 포기하고 전주교대 갈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


몇 초간의 침묵을 깨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모두의 반대 속에서 아버지만은 내 손을 들어주셨다.

누가 봐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교대에 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 선택의 결과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내 선택이었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대신 책임져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아버지는 수시로 전화해서 장학금을 받아야 하니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압박을 넣으셨다.

기숙사비와 생활비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이 되는 상황이라는 걸 알았기에 공강 시간마다 도서관을 찾았다.

동기들은 삼삼오오 모여 놀러 갈 때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고 수업내용을 복습했다.

그래야 저녁에 과내 소모임활동도 하고 술도 마시러 갈 수 있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과생활도 공부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1학년 1학기 성적이 나왔다.

당시 여름농활을 가 있어서 바로 확인을 못하다가

농활대가 학교로 복귀하는 날

사범대 로비에 있는 컴퓨터에서 확인했다.


A+

A+

A+

A+


성적표에는 전부 A+가 찍혀있었다.

동기들은 자기들이 살살해서 내가 All A+를 받은 거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턱 쏘라고 난리였다.

반은 맞는 말이었다.

1학기 점수로 다음학기 장학금은 확보를 했지만

4년 내내 이렇게 마음 졸일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장학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4년 장학금을 주는 재단을 검색해서 신청했다. 자소서에 면접까지 보며 겨우 4년 장학금을 거머쥐었다. 1학기 성적표를 받았을 때보다 더 기쁜 순간이었다.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동기들은 하나 둘

어학연수를 떠났다.

우리 집 형편에 어학연수라니,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해외 봉사활동을 알아봤다.

우연히 과선배에게 들었던 ‘캠프힐 커뮤니티’라는 곳이 마음에 들었다.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생활하는 일종의 기숙학교인데 미국에도 있고 영국에도 있었다.

주급을 제공하고 학생들 방학 동안 봉사자들도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교육기관이라는 것과 주급이 있어서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해리포터 덕후인 내가 꿈에 그리던 영국에 갈 수 있다니!


1년간 영국에서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임용시험 준비에 매진했다. 과에서 성적이 꽤 좋았고 교수님들이 예뻐하는 성실하고 수업태도가 좋은 학생이었다. 하지만 임용시험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첫 번째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

다음 해, 시험 장소가 사촌 오빠 집 근처라 오빠 집에서자고 시험장으로 가기로 했다.

오빠가 시험 전날 지하철역으로 마중 나왔다.

평소 왕래가 잦은 사이는 아니었다.

오빠는 나이차이도 많이 나고 무뚝뚝했다.

차 안에서 오빠가 불쑥 말했다.


그러니까 교대 갔으면 좋았잖아.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해.”


그렇다. 나는 그 한순간의 결정으로 대학 4년을 치열하게 보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수까지 하고 있었다. 감정이라곤 1도 섞이지 않은 말투로 날리는 팩트는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고집스럽고 비이성적으로 보일지라도 나에게 그게 옳은 선택이라면 기꺼이 모든 결과를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다 덤벼라, 세상아.’

뭐 이런 청춘의 호기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나란 사람의 본질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또 다른 비이성적인 선택은 교직에 첫 발을 내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당시 월급이 170만 원 남짓이었지만,

열심히 돈을 모아 결혼 자금이든 전세자금이든 마련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3천만 원 정도 대출을 받아달라고 하셨다. 집을 새로 짓는데 보태달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둘 다 죽으면 이거 다 니 거 되는 거니까 투자하라고 하셨다. 그 산골 마을에 있는 집을 팔아봐야 얼마나 할 것이며 거기에 내가 들어가 살 일도 만무했다.

현실적으로는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출 있는 여자를 어느 남자가 좋아할까?


설득이 잘 안 먹히자 아버지는 감성을 공략하셨다.

김장을 하느라 외가 식구들이 시골집에 모두 모여

자느라 나는 부모님과 함께 부엌에서 잤다.

어스름한 새벽녘에 아버지가 운을 뗐다.

아버지 친구가 귀향해서

얼마 전에 집을 새로 지으셨는데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셨단다.

진즉 새집을 지어 모시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도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좋은 집 지어서

모시고 살고 싶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돈 버느라 바쁜 부모님 대신

나를 키워주셨다.

그런 할머니를 조금이라도 편히 모시고 싶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아버지 욕망의 결정체


내 앞에는 빚 3000만 원이 생겼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빚의 존재는 소개팅을 나갈 때마다

위축되게 만들었다. 족쇄 같았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대출 상환 내역을 정리한 메모를 우연히 남편이 보게 되었다. 그게 뭐냐며 꼬치꼬치 캐묻는 남편.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들킨 기분이었다.

괜찮다며 솔직히 말해달라고 거듭 얘기하는 남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 빚이 있어.”

얼마나?”

3천만 원 정도.”


처음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남편은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이가 없어 왜 웃냐는 말에

뭘 그런 걸 숨기고 그러냐고,

가족을 위해 대출을 받은 게

뭐가 부끄러울 일이냐고 말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정말 괜찮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좋다는 황당한 소리를 해댔다.


자신은 늘 가족애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가족 간의 정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단다.

남편은 지금도 그때를

나와 결혼을 결심한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완벽한 조건의 배우자를 찾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는 요즘 청춘들의 눈엔

얼마나 비이성적인 판단일까?


부모님을 위해 빚을 얻은 여자,

그 사연에 감동해서

가진 거라곤 빚 3천만 원뿐인 여자와

결혼을 결심한 남자.


이런 비이성적인 선택들은

어쩌면 우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이성이 어찌하지 못하는

우리의 진짜 욕망.

그래서 삶은 이런 비이성적인 선택들로

소용돌이치고 굽이굽이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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