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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Jun 09. 2024

전주를 여행하는 방법

1박 2일 전주 여행을 마치고 친정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들이 말했다.


“왜 엄마가 여기를 좋아하는지 알겠어. 엄마의 추억이 있는 곳이라서 그렇잖아.”


이틀 동안 내가 아들에게 ‘라떼’얘기를 많이 했나 보다.

12살에 유학을 와서 스무 살 무렵까지 살았던 곳이라

곳곳에 추억이 묻어있었다.

서울생활을 시작하고는 십 년에 한 번 꼴로

친구들을 데리고 잠깐 놀러 온 게 전부인지라

익숙함과 낯섦이 혼재된 여행이었다.


시골집에서 9시 30분에 출발하려고 했으나

우리가 제때 출발한 적이 없지!

10시 30분을 넘겨서야 가까스로 출발했다.

라한호텔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복을 대여하려고 했으나

배가 고프다는 아들의 의견을 수용해서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베테랑’ 칼국수로 이동하는 길에

TV에서 자주 봤던 십원빵을 발견하고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 사서 아들과 나눠먹었다.

큰 감흥을 주는 맛은 아니었지만 배가 고팠는지

아들이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아직 본격적인 점심시간운 아니라서 그런지

베테랑 칼국수 쪽문으로 들어갔을 때

바로 자리가 있었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있던 가게라

한옥마을 올 일이 있으면 추억으로 들리곤 했다.

그런데 직전에 먹은 십원빵 탓인지

세월이 흐르며 내 입맛이 바뀐 건지

십 년 전쯤 친구들과 함께 왔을 땐 참 맛있게 먹었는데

오늘은 별로 맛이 없었다.

쫄면과 소바 중에 고민하다 아들도 함께 먹을 수 있는

소바를 시켰는데 내가 좋아하는 맛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밀려들 만큼

여전히 인기 있는 집이었지만

우리의 첫끼는 좀 아쉬웠다.

 베테랑 칼국수에서 나오니

성심여중 교정이 눈에 들어왔다.

나 때는 성심 여중과 여고의 옷이 세일러복이라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아이가 이해할 턱이 만무해서 혼자 옛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나는 몇 년 뒤에 또다시 베테랑 칼국수를

찾을지도 모른다.

맛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추억 때문에.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를 위해

한복대여점으로 향했다.

한복을 빌려 입고 가족사진을 찍는 게

이번 여행의 제일 중요한 일정이었다.

한복 입고 사진 찍자고 했을 때 아들이 대뜸 말했다.

“창피할 거 같은데….”


마흔 넘은 남편도 잘 구슬렸는데 아들이 예상치 못한 복병일 줄이야. 어린이집에 엘사옷 입고 가겠다고

떼쓰던 아들 입에서 한복 입고 돌아다니기

창피하단 소리가 나오다니….

황당하면서도 언제 이렇게 컸지 싶었다.

아들에게 엄마 소원이라고

아주 간절한 표정과 눈빛으로 말했더니

“그럼 해주지 뭐…”

선심을 써주셨다.


내 사진첩엔 매일 아들사진 아니면

아들과 놀아주는 남편 사진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는

꽃과 풍경사진만 쌓이고 있었다.

제대로 된 가족사진을 찍고 싶었다.

‘제대로 된’의 함축적 의미는

‘내가 예쁘게 나 온’ 사진이란 뜻이다.

전주에 왔으니 기념 삼아 한복 입고 찍으면

재밌을 것 같았다.

한복대여점은 차고 넘쳤는데

머리 손질을 해주는 곳으로 들어갔다.

신혼 때 결혼식을 위해 맞춘 한복이 아까워서

남편과 경복궁에 한복 입고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머리 손질을 할 줄 몰라 냅다 똥머리를 했더니

사진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외국인 눈엔 좋아 보였는지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과

기념촬영을 몇 번 해주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머리도 땋을 줄 모르는 똥손이라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정했다.

한복은 죄다 단아하고 고급진 맛이 없어서 별로였지만

헤어를 아주 화사하게 찰떡으로 해주셔서

만족스러웠다.

미리 알아봐 둔 ‘경기전옆사진관’에 도착했더니

이미 한 팀이 찍고 있어서 잠시 대기를 했다.

제일 기본 상품을 선택해서 우리 촬영은 금방 끝났다.

사진 속 내 얼굴이 하나같이 영 못마땅해서

기분이 상할 뻔했는데

작가님이 사진을 예술가의 솜씨로 아주 빠르게

작품으로 바꿔주셔서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원래 내 얼굴만 1인 정밀 보정비용을 추가했는데

센스 있게 남편 얼굴도 잘 어루만져주시고

사진도 보정본과 함께 몇 컷 더 보내주셨다.


엄마의 소원풀이에 적극 협조해 준 아드님을 위해

‘추억의 뽑기’로 오천 원 탕진하고

‘풍선 터트리기’로 만원을 날렸다.

아들이 조금 비협조적이다 싶을 땐

조금만 참으면 호텔 가서 체크인하고

물놀이하게 해 준다고 당근을 뿌렸다.

인터넷 검색 없이 돌아다니다가 느낌이 좋아서

들어간 장소 두 곳이 정말 만족스러웠다.


한 곳은 교동미술관인데

‘오름’을 주제로 작은 전시가 있었다.

오름을 전등처럼 표현한 게 무척 신선했고

미술관 앞마당에 활짝 핀 접시꽃이 너무 예뻤다.

어릴 때 접시꽃 안에 벌이 들어가 앉으면

살금살금 다가가 꽃봉오리를 오므려 벌을 잡곤 했다.

간혹 그러다 탈출에 성공한 벌에 쏘이기도 했는데

우리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대목이다.

깔깔깔 웃으며 지금 잡아보라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옆에 예쁜 소품샵이 있었는데

노오란 봄꽃으로 수놓아진 키친타월이 예뻐서

“너무 예쁘다. 이거 갖고 싶다. “

그랬더니, 대뜸

“내가 사줄까?”라고 말했다.

남편 말고 우리 아들이.

괜찮다는 대도 몇 번이나 자기가 사주겠다는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구매했다.

우리 아들은 벌써부터 여자의 언어를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것일까? 8년 가까이 같이 산 아빠도 아직

못 알아먹던데… 몇 년 지나면 여자친구 선물 사주느라아들한테 선물 받기 힘들 텐데

지금 많이 받아놔야 할지도!


두 번째로 만족스러웠던 장소는

‘차경’이라는 카페였다.

건너편에서 언뜻 봤는대도 공간을 너무 잘 꾸며놔서

목마르지 않냐며,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체크인하자고 남편과 아들을 꼬셔서 한복을 반납하자마자 찾아갔다

커피나 디저트보다는 정말 이름만큼이나 풍경이

특별한 장소였다. 비 오는 날 와도 참 좋겠다 싶은

그런 곳.



아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수영장에 가기 위해

체크인 시간에 맞춰서 숙소에 갔는데…

대기를 거의 한 시간가량 해야 했다.

체크인은 ‘미리’ 가서 대기를 걸어두십쇼!

체크인하자마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2층 수영장으로 입장!

시설대비 가격은 좀 비싼 것 같았지만

아들 취향 저격 포인트도 있어야

앞으로도 잘 따라다닐 테니까!

수온은 따뜻한 편이었음에도

오늘 해가 쨍하지 않은 데다 바람도 불어서

물 밖에 나가면 추웠다.

추워서 두 시간 정도 놀다가 나왔는데

한 여름에 오후부터 저녁 늦게 까지 놀면

그나마 이용료가 아깝지 않을 듯싶다.



저녁을 먹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맥주 마니아인 남편을 위해

국내 여행을 갈 때면 꼭 그 지역의 수제맥주 양조장을

알아봐서 가는 편인데,

이번엔 체코맥주 전문점을 찾아서 보여줬더니

아주 흡족해했다.

‘객사’ 위쪽이라 30분가량을 걸어야 했는데

물놀이도 했겠다 피곤한 아드님이 어찌나 찡찡대는지

그러거나 말거나 학창 시절에 돌아다니던 길을 걸으며

엄마의 ‘라테’ 타령이 폭발해 버렸다.

풍년제과 사거리로 가는 길에 보이는 추억의 홍지서림

당연히 없어졌을 줄 알았는데 멀리 간판이 보여

반가웠다. 풍년제과가 지금처럼 대박을 터트리기 전,

그 옛날에는 친구들과 2층에 앉아 수다를 떨곤 했다.

약속을 잡으면 무조건 ‘객사’ 앞에서 보자고 할 만큼

전주 시내 하면 객사였는데….

길거리에 너저분하게 나뒹구는 전단지처럼

휑하고 쇠락한 모습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살던 큰집은 한옥마을 바로 옆이었는데

내가 스무 살 무렵에만 해도 아직 개발 중이라

휑하고 볼 것도 별로 없고 행인도 드물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객사 상권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활기가 가득했다.

내가 나이를 먹은 것처럼

내 추억의 장소도 나이 들고 빛을 잃었구나…

방금 지나 온 한옥마을과 너무 대조되는

객사 뒷길의 풍경이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자

아까와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곳곳에 힙하고 젊음 넘치는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가끔 전주에 내려오면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다 못해 어떤 순간엔

시간도 공기도 멈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전주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도시도 꼭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존재 같았다.

쇠락하는 곳이 있는 반면

빠져나간 에너지는 어딘가에 모이고 축적되어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듯했다.

밥을 먹고 남편과 아들은 택시 타고 먼저 들어가고

나는 소화시킬 겸 혼자 걸어갔다.

체코맥주 전문점에서 먹은 음식도, 맥주도

너무 맛있었지만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전주의 옛 모습과 현재에 대한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제 일정이 힘들었는지

7시면 일어나서 모두를 깨우고 돌아다니는 아들마저

9시에 일어났다.

피곤한지 씻기도 귀찮고 밥 먹으러 가기도 귀찮고

다 귀찮다고 귀차니즘을 시전 해서

아침부터 엄마의 화를 돋웠다.

느릿느릿 준비한 끝에 10시 40분쯤 체크아웃을 하고

‘카페 1938 맨션’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비가 오긴 했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비라 운치 있고 좋았다.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맛있어서

만족스러운 첫끼였다.


차를 타고 향한 전주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바로

전주에 십 년 가까이 살고서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동네에 있는

팔복예술공장.


도시 외곽에 여러 공장들이 모여있었다.

이런 곳에 정말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가 있다고?

의심이 싹트려는 순간,

좌회전해서 들어간 골목에는

예술 갬성이 넘쳐흐르는

빨간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국제그림책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이긴 했지만

벽면에 한 장 한 장 작가들이 그린 원화를 붙어있었다.

그림을 보고 그 위에 적힌 글귀를 읽으며

아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윤덕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 공간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고, ‘행복한 붕붕어’책을

아이와 함께 읽어나갔다.


반대쪽 공간은 니콜라스 하이델바흐라는 작가의 책이 벽면을 따라 전시되어 있었다.

‘나의 문어’라는 책이 눈길을 끌었다.

인간 친구에게 마음을 뺏겨 집을 떠난 아들문어.

엄마문어가 아들 문어를 데리러 인간 친구 집에

찾아온 장면을 보고,

‘아들 문어는 엄마를 따라갔을까?’라고 아들에게 물었더니, ‘당연히 엄마가 데리러 왔는데 따라가야지.’라고

엄마 맞춤형 대답을 해주었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 중에

‘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라는 제목이 흥미로워서

아이에게 읽어줬는데 마법처럼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지다가 마지막에 예상치도 못한 반전이 있어서

놀람과 당혹감, 그리고 마음 한 편 먹먹함을 불러왔다.

어쩌면 이런 게 그림책의 힘이자 매력이지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남겨진 아이가 그 상실감에 대처하는 방식을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라는 ‘ 다분히 환상적이지만 아이 내면의 단단함이 느껴지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간혹 내가 행여 일찍 하늘나라로 가면 남겨진 아이가 너무 짠할 거 같아 울컥하기도 하는 엄마로서, 잠깐 읽은 그 책의 그 여운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팔복예술공장의 또 다른 장소에서는 앤디워홀 전시회가 있어서 구경했는데 이 모든 게 무료 전시라니!

워낙 유명한 작가라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엄청 유명한 작가라고 했더니 아이가 물었다.

“그림을 엄청 섬세하고 멋지게 잘 그려요? “


그것보단 기존에 팽배하던 예술에 대한 관념을 깨뜨리고 일상생활의 소재를 활용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서 유명해진 거라고 말하며 아이의 표정을 봤는데

 그건 분명 듣고는 있지만 정신은 저 먼 곳에 가있는 게

틀림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래도 엄마에겐 포기란 없다!

캠벨 수프 그림이나 메릴린먼로, 바나나 그림 등을

보면서 이 작가가 일상적인 소재들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전시실에서 나오는 길에,

재래식 화장실 변기가 늘어서 있고

화장실 벽면에 달린 조그만 모니터에 인터뷰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원래 이곳은 카세트 공장이었다고 한다.

당시 여공이었던 여성들의 인터뷰가 모니터에서

흘러나왔다.

아주 기막힌 타이밍으로

이 주 전쯤 수원시립미술관에서 비슷한 주제의 전시를

아이와 함께 관람한 적이 있었다.

개발도상국에서 어린 소녀들이

남자형제를 뒷바라지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교육도 받지 못하고 공장으로 내몰렸던 상황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었다.

방직공장에서 실을 염색하고 천을 짜는 과정을

아주 단순화해서 사람 신체의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을 찍은 영상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아이와 한참을 앉아서 보았다.

의도적으로 인간을 기계의 일부

혹은 그 자체로 표현한 것 같았다.

그 작품을 보며 아이에게 배경이 되는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실제 아이의 외할머니이자 나의 엄마도

중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 가서 돈을 벌어야만 했다. 단순히 형편이 어려워서 맏딸인 나의 엄마가

어린 나이에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고,

한 개인의 서사로 알고 있는 것과

근현대사라는 큰 줄기 속에서

객관화된 엄마의 삶을 바라보는 것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때도 오늘도 아이는 내게 말했다.

“엄마는 옛날에 안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다시 한번 사람들이 그렇게 외쳐대는 ‘공정’과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시대에 어떤 나라에서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날지 누구도 선택할 수 없으니까.

언젠가는 아들과 이런 대화를 하는 날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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