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팀장이 되고 얼마 뒤,
팀장 워크숍에 다녀왔다.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재밌는 얘기를 해주겠단다.
한 세션에서 10년 뒤의 목표를 세우라는 과제를
받았단다. 그 과제의 출제의도는 분명 팀장으로서
향후 10년 동안 조직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끌고
어떻게 커리어에서 더 위로 도약할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적으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약삭빠른 남편이 출제의도를 몰랐을 리 없지만,
당당하게 내가 몇 달 전에 빼곡히 적어서
카톡으로 보내 준 우리의 10년 뒤 동반퇴사 계획을
적었단다. 돌아다니며 과제를 살펴보던 강사가
남편이 써낸 것을 보고 놀람과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고 했다. 자기가 여태껏 퇴사를 꿈꾸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목표를 세운 사람은 처음이라며, 이 세션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팀장님의 꿈을 응원한다는 말을 덧붙였단다.
싱글벙글한 남편의 표정에서
동반 은퇴계획의 원작자인 나를 치켜세움과 동시에
정말 10년 뒤에 회사를 나오겠다는 희망과 의지가
엿보였다.
결혼 후 남편은 종종 10년만 다니면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농담인 듯 진담인 듯했다.
처음엔 그저 어이가 없다며 웃어넘겼다.
가끔 공무원 아내 믿고 허황된 꿈을 꾸는 게 아닌가
괘씸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엔 나도 진지하게 받아치곤 했다.
"단, 조건이 있어. 일단 우리 집 대출을 다 갚아야 하고, 현금은.... 한 2억은 있어야겠지? 그리고 매 달 최소
300만 원씩 벌어와. 그럼 그 퇴사 허락해 줄게."
내가 내건 조건을 들은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냥 나가지 말란 소리 아니야?"
“난 진심인데?!”
물론 진심 맞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정말 할 수 있겠어?라는 다소 고약한 심보가 반영되긴 했지만.
하지만 남편은 이 악조건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는지,
"진짜 저 조건만 충족시키면 퇴사해도 되지?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마."라고 말했다.
하루는 궁금해서 물었다.
"회사 그만두고 뭐 하게?"
"몰라. 카페나 할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우후죽순 생겨났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카페가 얼마나 많은데
저런 한가한 소리를 해대는 남편을 보며
절로 한숨이 나왔다.
"프리랜서 하면 되잖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면 해외 취업도 잘된다던데? 우리 저기 동유럽 같은 데 가서
외노자의 삶을 살아보는 건 어때?"
스리슬쩍 나의 로망을 들이밀었다. 이민 갈 생각은
없지만 해외에서는 살아보고 싶은 나의 욕망을 남편을 통해 실현시켜 볼 수 있으려나.
"싫어. 퇴사하면 이쪽 일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
"그게 그렇게 싫어?"
"어. 지금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해."
링크드인에다가 이력서도 적어보고 프리랜서의 삶을 준비해 보라고 여러 번 등을 떠밀어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럼 매달 300만 원을 어떻게 벌어오게?"
"뭐, 편의점 알바라도 해서 벌면 되지."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고 편의점 알바라도 하겠다는
남편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그냥 저러다 말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그러다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퇴사 얘기를 먼저 꺼낸 건 오히려 내쪽이었다.
처음엔 그저 장난스러운 오기였다.
"너만 퇴사하냐? 그럼 나도 퇴사할래."
나의 도발에도 남편은 태연했다.
"그래라.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그만둬. 난 괜찮아."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저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 번 퇴사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나니
생각이 자꾸 그쪽으로 쏠렸다.
그 당시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온통 주식과 재테크에 관한 것이었고
자연스럽게 '파이어족'이라는 키워드에도 노출되었다.
우리도 파이어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021년의 어느 날,
나는 동반 은퇴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가 남편에게 말한 조건을
가능하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10년 뒤면 주담대의 일부만 남기 때문에
소소한 공무원 퇴직금으로 나머지 대출을
청산할 수 있을 테다.
현금 2억은…. 남편의 퇴직금과 공제회 장기저축으로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문제는 월 300만 원이었다.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고려해
남편과 내가 각각 월 150만 원씩 배당을 받는다면?
기본적인 생활은 가능할 것이다.
남편이 55세가 되는 해에는 주택연금을 신청하고
내가 55세가 되는 해에는 연금저축펀드에서
월 100만 원가량 인출이 가능하다.
주택연금이나 연금저축에서
추가비용을 충당할 수 있기 전까진
알바를 하며 여행비용 정도만 벌면 되지 않을까
희망회로를 굴렸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동반 은퇴는 더 이상 허황된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계획이 되었다.
종종 친구들이 언제까지 일해야 하나,
일찍 은퇴하고 싶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내 계획을 들려주곤 했다.
그럼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멋진 계획이네. 하지만 난 안돼.’
그런 반응이었다.
조기은퇴란 절대 그들에게 실현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10년 뒤 함께 은퇴하는
구체적인 미래를 그리고 남편과 공유하며
계속 말로 내뱉었다.
일종의 자기 충족예언이랄까.
우주의 기운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2019년에 시작되었다.
2019년은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중요한 해였다.
우리의 첫 집이 생겼다.
영끌을 해서 과천으로 들어갈까 고민도 했지만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던 우리는
부동산을 통한 자산 증식의 기회를 포기했다.
대신 15년 만기로 적절한 수준의 대출을 받아
제네시스 GV80 풀옵션보다 비싼 돈을
인테리어에 쏟아부었다.
크게 오르진 못했어도 좋은 시기에 구매해서
살벌한 고금리 여파로 부동산 가격이 뚝 뚝
떨어질 때도 맘 편히 지낼 수 있었다.
부동산이 엄청나게 상승하던 그 시절
우리 역시 임장이란 걸 다녀보기도 하고
잠깐 부동산 투자를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동산 중개사무소만 가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너무 불편하고
집을 보러 다니는 게 재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남편은 1억에 달하는 거금을
한 곳에 투자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다.
더욱이 대출을 받아서까지 하고 싶진 않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주변에서 부동산 갭투자를 해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자 욕심이 났지만
남편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도 재테크를 전혀 안 할 수는 없다는 데
둘 다 동의했고 남편이 부동산 대안으로
주식투자를 슬그머니 제시했다.
어릴 때부터 주식투자로 퇴직금 날린 큰아버지와
그로 인해 절대 주식하는 남자 만나지 말라는 얘기를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하시던 큰어머니 밑에서 8년을
살다 보니 아무래도 주식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왔던 터라 남편 입장에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자신 있다고 나를 설득했고,
우리는 그날 밤 주식 투자를 결정했다.
그때가 2019년 12월이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처음으로 유튜브에 주식투자를 검색했다.
그전까지 나는 유튜브에서 영상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요즘은 사람들이 유튜브에서 정보를 얻는다길래,
그야말로 주린이 수준도 안 되는 배아 단계였던 나는
정보를 찾아 매일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져들었다.
그때 내가 매일 같이 듣던 삼 프로 tv 구독자가
10만 명이 채 안되던 시기였다.
부동산과 다르게 매일매일 주식 정보를 알아가는 게
재밌었다. 알고리즘은 나를 점차 미국 주식의 세계로
이끌었고 남편보다도 먼저 미국주식 계좌를 개설했다.
그때부터 약 두 달간 미국 주식을 해야 한다고 남편을 설득했다. 세상이 변하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남편이 미국 주식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얼마 뒤,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눈여겨보던 미국 주식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900달러가 넘던 테슬라가 400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남편을 시켜 테슬라 4주를 샀다.
연준의 금리 인하 발표 후
주식이 일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추매를 하자고 했지만 남편은 지금 이렇게 코로나가
극심한데 분명 다시 떨어질 거라고, 기다리자고 했다.
남편은 지금도 그때 내 말을 듣지 않은 걸 두고
후회한다. 그 이후 주식시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난 5년간 우리는 주식 투자를 하며
열탕과 냉탕을 오갔고
상승장의 흥분과 하락장의 공포를 모두 경험했다.
큰 수익을 보여준 종목도 있고
상장폐지가 된 주식도 있다.
중소형주 상승장에 불나방처럼 뛰어든 결과
값진 수업료를 많이 지불해야 했다.
(나중에 많이 오른 주식을 일부 수익실현 할 때
절세용으로 남겨두고 있다.)
그래도 중요한 건
우리가 주식 시장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덕분에 인생을 뒤바꿀 부를 이루진 못했지만
첫 해 투자금의 10배 정도 되는 금액이
주식계좌에 쌓여있다는 것이다.
코로나로 여행은 물론 외출도 어렵던 그 시기에
집중적으로 투자금을 늘려나갔다.
월급에서 남는 돈은 모두 주식계좌로 들어갔다.
상여금이나 성과급도 모두 주식계좌로 빨려 들어갔다.
옷이나 보석보다도 주식 사는 게 더 좋았다.
금리인상으로 인한 하락장에서도
공포를 이겨내고 꾸준히 주식을 늘려나갔다.
주식 시장에셔 오래 버티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한 방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10년 뒤 동반 은퇴,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월 300만 원 배당을 받을 수 있는
투자금이었다.
나는 사실 지금도 주식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차트도 볼 줄 모르고 매수, 매도 타이밍도 모른다.
유일하게 터득한 건, 탐욕을 경계하고
공포가 기회를 준다는 것 정도.
남편과 나의 유일한 사치는 여행이다.
우리는 여전히 15년 넘은 아반떼 하나를 공유한다.
남편이 따로 투자하고 있는 코인이 떡상하면
그때 진짜 테슬라를 한 대 뽑아준다는데,
우리 가족 같은 아반떼가 주행거리 20만을
넘기기 전이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여전히 월급의 나머지는 대부분 각자의 주식계좌로
들어간다.
앞으로 8년 뒤에도 주식 시장에서 살아남아
동반 퇴사의 꿈을 이룰 수 있기를,
오늘도 우주의 기운을 모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