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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Jul 01. 2024

산책이 주는 즐거움

속초에서 출발해 집에 도착하니 오후 5시였다.

밤새 비가 쏟아지더니 오전 내내 흐리다가

저녁이 될 무렵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이틀 내내 잔뜩 먹어서 이른 저녁밥을 먹자마자

나가기 싫다는 아이를 잡아끌고 친정엄마와 셋이

산책을 나섰다.

아직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들이

엄마 기분을 좋게 해주고 싶었는지 무심코

엄마가 원하면 언제든 산책을 같이 가주겠다고

덜컥 약속을 해버린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나섰다.

지난주에 몇 번 산책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너무 힘들다고, 못 나가겠다고 해서

한 번 제대로 혼이 나기도 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한 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고.

7세 꼬맹이가 자기가 가볍게 내뱉은 말의 무게를

어찌 알까 싶지만,

그 순간 기분 좋다고 아무 약속이나 덜컥하는 건

아무래도 커서도 큰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단단히 혼쭐(?)을 냈다.

그래서인지 이번엔

느릿느릿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따라나섰다.

솔직히 나 혼자 귀에 이어폰 꽂고 후딱 두 바퀴 돌고     

오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편하고 좋다.

하지만 워낙 잘 먹는 아이라

체중 조절을 위해 운동을 할 필요가 있어서

“엄마는 너랑 산책하는 게 훨씬 재밌단 말이야. “라고

7세 꼬맹이에게 갖은 애교를 부려가며 끌고 나왔다.


그래도 막상 나오면 둘 다 즐겁다.

늘 똑같은 길이지만

재밌는 사건들이 일어나곤 한다.

하지에는 해가 제일 길다고 했더니 그럼 자기도

그날은 늦게까지 놀다 자고 싶대서

저녁 늦게 산책을 데리고 나왔는데

대왕 달도 보고,

두꺼비도 봤다.

내가 한 눈 판 사이 두꺼비 등을 손으로 슬쩍 만지고는

신나게 무용담을 자랑했는데

지나가던 어르신들이 두꺼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고

얼른 손 씻기라고 해서

후다다닥 화장실로 뛰어가기도 했다.


이번에는 조금 걷다 보니

허공에 신기한 게 있었다.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실에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매달려 있나 신기해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봤다.

아주 미세하게 나뭇가지 끝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내가 잘 못 봤나 싶어 계속 쳐다봤는데

틀림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순간 아이가 그 밑으로 아슬아슬하게 지나왔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그 녀석이 땅에 툭! 떨어졌다.

아이랑 둘이 “으악! 움직이는 것 봐! “ 호들갑을 떨며, 하지만 얼굴엔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기쁨이 가득한 채, 그 나뭇가지 같은 벌레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걸

지켜봤다.

“대벌레 아니야? 너 대벌레 처음 보지?!”

“나 대벌레 본 적 있어. 유치원에서.”

“정말?”

“근데 그땐 더 큰 나무 막대기 같고 다리도 달려있었어.”

“그래? 그럼 이건 대벌레가 아닌가? 얘는 다리는

없잖아. 잠깐만, 한 번 찾아보자. “

아이 말대로 대벌레는 다리가 달려있었다.

그럼 이 벌레의 정체는 뭐지?

문득 기억 저 편에서 ’ 자벌레‘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유레카!

검색을 해보니 우리가 본 건 자벌레였다.

아이와 의기양양하게

할머니를 쫓아가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근래에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코스는

저수지 산책로 옆에 있는 논 뷰 구간이다.

지난번에 두꺼비를 발견한 곳도 그곳이었다.

한 달 전쯤에는 할머니와 올챙이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기도 했다.

요즘 엄마 청둥오리가 새끼들을 이끌고 산책로를 가로질러 논 안으로 들어가 벌레를 잡아먹곤 한다.

이 주 전쯤 산책하다가 산책로를 건너가는 오리가족을 본 적이 있다. 딱 식사 시간이었는지 연달아 두 번이나 목격했다.

엄마 뒤를 쫓아 뒤뚱뒤뚱 걷는 아기 오리들이

얼마나 귀엽던지!


이번에는 새로운 오리 가족이 보였다.

아들 손바닥만 한 귀염뽀짝 아기 오리들이

정신없이 저녁 식사 중이었다.

아들은 자기도 오리 가족이 산책로를 건너가는 걸

보고 싶은데 오늘도 못 봐서 너무 아쉽다고 했다.

엄마도 보고 할머니도 봤는데 자기만 못 봤다며!

그건 아주 운이 좋아야 하는 거라고, 보고 싶으면

더 자주 산책을 따라오라고 달랬다.

그래도 산책이 즐거웠는지

한 바퀴를 더 돌겠다고 했다.

시간도 늦었고 힘들 거 같아

반바퀴만 돌고 돌아가자고 했더니,

그래도 TV 쿠폰 두 장 줄거냐길래 그러겠다고 했다.

사실 아들이 산책에 따라나서는 이유는

엄마와의 약속도, 엄마의 애교도 아닌

바로 추가 TV 시청 쿠폰을 받기 위해서!

한 바퀴 돌면 15분을 더 볼 수 있는 쿠폰을 주는데

주말에만 사용할 수 있다.

약속한 반환점까지 왔는데 어쩐 일로 한 바퀴를 다

돌고 싶다고 했다.

목욕도 시켜야 하고 그림일기도 써야 하고 책도 읽어줘야 하고 할 일이 잔뜩 떠올랐지만 목표한 대로 끝까지 완주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거 같았다.

두 바퀴를 완주하고 힘껏 하이파이브를 했다.

아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처음으로 두 바퀴를 완주한 걸 축하해 줬다.

오늘 그림일기의 주제도 ‘산책’이었다.

완주했을 때 소감이 어땠냐고 물었더니

마법 단어인 “좋았다.”로 퉁치길래

구체적으로 어떻게 좋았냐고 다시 물었다.

‘행복하다, 설레다, 재밌다, 뿌듯하다, 자랑스럽다 등’

‘좋다 ‘라는 두리뭉실한 덩어리 말고,

좀 더 또렷한 윤곽을 가진 단어로 그 순간의 감정을

표현하도록 했다.

아이는 ‘뿌듯했다.’로 그날의 일기를 마무리했다.


산책을 하다 보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그거 하지 말아라’

그런 거 말고 이런저런 다채로운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오늘 그림일기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가 왜 그림일기를 써야 하는지 물었다.

한글 쓰기 연습도 할 수 있고

매일 글을 쓰면 글을 잘 쓰게 된다고 말해주었다.

나중에 엄마가 쓴 글이랑

아이가 쓴 글을 모아 책을 만들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불만은,

자기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써야 하는 데

엄마는 글만 쓰는 게 불공평하다며

엄마도 둘 다 해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그림은 자신이 없으니까 대신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자기도 그림 배웠는데도 그림에 자신이 없으면 사진을 찍겠다고 해서 그러자고 합의를 보았다.

아이가 어떤 능력을 가졌으면 좋겠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아이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러려면 많이 써보는 것만큼 좋은 훈련이 없으니까

매일 쓰는 일기든,

여행을 다녀와서 쓴 여행의 기록이든

책으로 남겨주고 싶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도록.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이런 말도 했다.

“공부는 재미없어. 힘들어.”

“엄마랑 일기 쓰는 거나 영어공부 이는 거 재미없어?”

“아니 조금 재밌기도 한데, 힘들긴 하지.”

“원래 공부가 그래. 힘들고 하기 싫고. 근데 하다 보면 조금 재밌는 거 같기도 하고, 다 하고 나면 뿌듯하고.”

“지금은 괜찮은데 초등학교 가면 어려운 거 공부해야 하잖아.”

“차근차근 한 단계씩 해나가면 어려운 것도 해볼 만하게 느껴질 거야. 아무 준비도 안 됐는데 갑자기 어려운 걸 하려고 하면 힘든 거고. 엄마가 뭔가를 배울 땐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했지? “

“꾸준히 하는 거.”

“맞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려워 보이던 것도 어느새 할 수 있게 돼있어.”

“나 이제 그네도 잘 타잖아.”

“맞아. 그리고 꾸준히 엄마랑 공부해서 이제 한글도 잘 읽고 쓰는 것도 할 수 있잖아.”

“한글은 당연히 읽고 쓸 수 있어야지. 그걸 못하면 되겠어?”


불과 반년 전만 해도 한글을 못 읽어서

매일 엄마한테 혼나가며 배우던 녀석이 허세는!

뭔가를 배울 때 영민하거나 특출 난 건 없지만

아이는 꾸준히 참고 견딜 줄 안다.

그건 배움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능력임을 알기에

종종 이런 생각을 말로 표현해주곤 한다.

잘 못해서 혹은 엄마한테 혼나서 속상해하다가도

다음 날엔 언제 그랬냐는 듯

힘들긴 하지만 조금은 재밌다며

그 시간을 견뎌내는 아이가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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