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다 같이 아침을 먹고 9시 40분쯤 집을 나섰다. 눈 소식이 있긴 했지만 지난 주에 푸근했던 탓에 잊고 있었는데 싸락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다시 올라갔다오면 시간이 촉박할까 봐 우산을 가져오겠다는 남편을 붙잡고 그냥 가자고 했다. 투덜거리는 남편과 눈을 보고 마냥 신난 아들 손을 잡아끌고 걷다가 5분 뒤에 남편에게 바로 사과했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었고 우리는 싸락눈이 머리에 하얗게 내려앉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눈이 오는 입학식 풍경이라니.
아이들은 반별로 정해진 자리에 앉았고 학부모들은 아이들 좌석 뒤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얼굴에 긴장과 설렘이 묻어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대견해 보이기도 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아이들은 선생님의 인솔하에 교실로 이동하고 학부모들은 강당에 남아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익숙한 학교 얘기들인데 학부모 좌석에 앉아 듣고 있으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설명이 끝나고 아이 교실 앞으로 내려갔다. 책상 앞에 서서 가방을 정리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 뒤쪽에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5세 때부터 유치원에서 서로 죽고 못살던 C도 같은 반이었다. 교실 밖으로 아이와 함께 나온 C의 첫마디에 웃음이 터졌다.
“OO엄마 번호가 뭐예요?”
처음에는 아이의 반 번호를 묻는 건가 했는데 알고 보니 내 휴대폰 번호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이가 발리에 가고 없는 동안 많이 보고 싶어 했다고. C의 간절한 눈빛에 C의 엄마가 얼른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로써 두 번째로 아이 친구 엄마 번호가 저장되었다. 같은 축구 클럽에 다니는 S도 같은 반이 되었다. 둘이 아직은그렇게 가까운 것 같지는 않지만 차차 더 친해질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쉬다가 두 시에 방과후 수업을 들으러 다시 학교에 갔다. 입학식날부터 한자 방과후 수업이 시작돼서 아이도 짐짓 놀란 것 같았지만 군말 없이 학교로 향했다. 방과후 수업은 세 개를 신청했는데 추첨으로 두 개는 뽑히고 하나는 대기명단에 올랐다. 가장 기대하던 바둑 수업이 대기라 아쉽긴 했다. 추첨에 성공한 수업은 한자와 3D펜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추첨에 떨어질 걸 생각해서 5개씩 신청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는 엄마들이 없으면 이런 정보력에서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어쩌겠나, 나의 사회성 부족 탓인데. 방과후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이를 다시 데려오는 데 벌써 피곤한 기분이었다. 앞으로 있을 초등 학부모 생활의 맛보기 같은 느낌이랄까?
저녁을 먹고 나자 피로가 확 몰려왔다. 찬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닌 탓에 몸도 으슬으슬 추웠다. 아이에게 밥 다 먹었으면 그릇 부엌에 갖다 놓고 밥 먹은 자리를 닦으라고 했다. 두 달 전부터 해오던 일이라 순순히 하는 편인데 오늘 갑자기 장난스레 엄마가 해주라고 말하며 다른 방으로 도망을 갔다. 장난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기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들을 불러냈다. 여러 차례 부른 끝에 다시 거실로 나와 테이블 정리를 끝냈다. 새 잠옷을 꺼내와서 갈아입으라고 주었더니 그냥 갖다 놓으면 알아서 입는데 왜 말을 하냐며 나한테 볼멘소리를 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한 번 쏘아보고 벗어놓은 옷은 빨래 바구니에 갖다 놓으라고 말하고는 다른 볼일을 보러 갔다. 거실로 돌아왔더니 아들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옷가지를 품에 안고 애벌레처럼 기어가기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에 빨리 옷 갖다 놓으라고 큰 소리를 쳤더니 아들이 "가고 있잖아!"라고 맞받아쳤다. 뭔가 하기 싫은 일을 시켰을 때 일부러 느릿느릿하며 내 속을 뒤집어 놓는 방식으로 반항을 하는 녀석이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양치를 하라고 했더니 칫솔을 입에 문 채로 솜으로 만든 공을 발로 차고 다녔다. 이성의 끈이 툭! 끊어져버렸다. 양치할 때 치약물 바닥에 다 흘리니까 돌아다니면서 하지 말라고 도대체 몇 번을 말했냐며 맹렬하게 퍼부었다. 누가봐도 반항하는 게 티가 나도록 의자에 거칠게 앉으며 내가 보이지 않는 쪽으로 고개를 야몰 차게 돌리는 아들. 입을 헹구러 가는 동안에도 엄마 쪽은 절대 쳐다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든 할 일이 끝나고 말없이 침대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너무 추워서 한참을 이불을 꽁꽁 두른 채 누워있었다. 몸에 온기가 퍼지자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아이도 오늘 하루 바쁘게 이곳저곳 옮겨 다니느라, 나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긴장하고 피곤했을 터였다. 그래서 어쩌면 응석을 부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 기분이 풀린 아들이 침대로 뛰어들며 나를 덥석 안았다.
"미야옹 미야옹."
고양이 흉내를 내며 애교를 부리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배도 어루만지고 볼을 맞대고 비비다가 꼭 껴안고 말했다.
"엄마가 아까 너무 사납게 말해서 미안해. 그렇게까지 큰 소리 내며 말할 일은 아니었는데 엄마가 너무 피곤하고 춥고 그래서 참지 못하고 심하게 말했어. 미안해."
"응."이라고 짧게 말했지만, 몹시 흡족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꼭 껴안은 아들의 몸을 통해 기분 좋은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