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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빠를수록 좋다.

by Jade

휴직을 하고 아들과 사이가 훨씬 좋아졌다.

오히려 어릴 때보다 더 틈만 나면 찰싹 달라붙고

껴안고 애교를 부린다.

물론 집 밖에만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 걸음 정도 떨어져서 걷는다.

학교 앞에서는 행여 엄마가 진짜 뽀뽀라도 할까 봐

엄마 손을 뿌리치고 후다닥 교문을 통과한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교문 앞에서 뽀뽀해도 된다고 그러더니.

장난 삼아 물어본 거라

진짜 뽀뽀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쌩하니 달려가는 아들을 보니

다 컸다 싶기도 하고, 묘하게 아쉽기도 했다.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수영도 하고,

수영 강습이 없는 날엔 산책도 하고,

책도 읽고,

집안일도 하고,

일할 때 보다 훨씬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아들이 돌아왔을 때

더 반갑게, 더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다.

퇴근하고 허겁지겁 유치원으로 달려가서 하원시킬 때 하고는 다를 수밖에.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언성이 높아질 때가 있다.

일명 ‘사나운 고양이 주의보’가 발동된다.

한 두 번 말할 때는 부드럽게, 좋게 좋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한 번에 제대로 안 해서 여러 번 말하게 되면

화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 상태가 되면 아이의 모든 것이 지적할 것 투성이다.

가방 정리하라고 했는데 바닥에 내팽개쳐 놓았다거나,

책상이 온통 접다 만 색종이와

오리다 만 종이로 뒤덮여 있다거나,

입에는 오늘 점심 급식에 나왔을 짜장소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거나,

틀린 부분 고쳐놓으라고 펼쳐 놓은 학습지는 손도 안 대고 딴짓을 하고 있다거나.

기분 좋을 땐 그러려니 넘어가는 것들이

한 번 거슬리기 시작하면 굴비 엮듯 쭈욱 따라온다.

하나씩 지적할 때마다 목소리도 커지고

아들 말에 따르면 사나워진다.

처음엔 눈치를 보던 아들도

엄마의 잔소리가 자신의 임계치를 넘으면

“사납게 좀 말하지 마.”라고 소리친다.

엄마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걸로 따지지는 못하고

엄마 말투가 기분이 나쁘다며 부드럽게 말하라고 되려 화를 낸다.

그런 태도가 내 안에 화를 더 부채질한다.

“엄마가 처음부터 사납게 말했어? 여러 번 말해도 제대로 안 하니까 엄마가 그러는 거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사건의 발단이 뭐든 간에 아들과 엄마의 다툼은

늘 똑같은 레퍼토리로 귀결된다.

여기서 쉽게 굽힐 아들이 아니지.

”하면 될 거 아니야. “

또 나와버렸다. 내 분노 기폭제 1.

저 말을 들으면 가슴 언저리까지 차있던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경험을 한다.

그래도 그렇지, 그날은 내가 좀 심하긴 했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고 싶어서,

말버릇이 그게 뭐냐며 존댓말을 쓰라고 했다.

잠시 멈칫하던 아들이 결국 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을 날렸다.

“내가 왜?”

분노 기폭제 2에 결국 급발진을 하고야 말았다.

“존댓말 쓰라고 했지!“

풀액셀이었다.

깜짝 놀란 아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내가 왜요.”


한 시간 동안 서로 말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내가 있던 방으로 달려온 아들이 말했다.

“엄마 화해 하자.”

아들은 엄마가 사납게 말하는 게 속상하다고 했다.

자기는 하고 있는데 엄마가 자꾸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하는 것도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내 입장을 전달할 차례다.

엄마도 처음에는 부드럽게 말하지 않았냐, 제대로 안되니까 여러 번 말하다 보니 화가 나서 그러는 거다, 앞으로 서로 조심하자, 그리고….


“엄마가 아까 너무 존댓말 하라고 너무 크게 소리 지른 건 미안해.”


방금 전까지 화해하자며 기분 좋게 달려왔던 아들이

내 사과를 듣자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도, 아까 엄마가 소리 지른 게 무서웠어?”

아들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끄덕였다.

5분 정도를 더 울다가 다시 내 품에 안겼다.



출장에서 돌아온 아빠차를 타고 외출을 하다가

며칠 전 얘기가 나왔다.

아들이 엄마는 가끔 너무 사나운 고양이가 된다며 떠들었다. 이번에는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할 테니 하고 싶은 말 실컷 해보라고 했다. 아들은 신나서 엄마 흉을 봤다.

엄마가 존댓말 쓰라고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지 아랫집, 옆집에서도 다 들었을 거라며 창피해서 어떡하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빠는 아들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약속대로 입을 다물고 아들이 하는 말을 다 들었다. 중간중간 “뭐어? “라든가 ”그건 아니지.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아들을 부추겼다. 내가 사과를 했을 때 아들이 울어서 사실 나도 좀 당황을 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아이의 마음에 큰 상처를 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늦지 않은 사과 덕분에 그날 일에 대해 너스레를 떨 만큼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까?

어렵다. 어른스럽게 아이를 대한다는 게.

화가 나면 나도 똑같이 유치해져서 밑바닥을 드러낸다.

상처 주지 않고 키우는 게 가능할까?

자신이 없다.

다만, 나의 사과가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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