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가장 와닿는 말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지키기 어려운 말도,
'적당히'이다.
사회적 인간관계에서는 적당히 끼고 적당히 빠지는 게 중요하다. 일명 '낄끼빠빠'라고 하던가.
아이를 양육할 때도 적당히 엄격하고 적당히 포용적이어야 한다는 게 국룰이다.
문제는 그 '적당히'가 대체 어느 지점인지 알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너무 과하지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그 사이 어딘가를 아는 게 삶의 지혜가 아닐까.
아이와 관계에서 늘 균형을 고민한다.
시소 양 끝에 아이와 내가 타고 있다.
주도권이 아이에게 너무 기울어도 안되고,
엄마에게 너무 기울어도 탈이 생긴다.
아이에게 치우치면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하고
엄마가 주도권을 꽉 쥐고 흔들면
아이는 엄마의 꼭두각시가 될 뿐이다.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때에 따라 엄마가 통제하고 훈육할 수 있는
그 접점을 찾으려 부단히 애쓴다.
이제 막 학령기에 들어선 아이의 학업에도
'적당히'가 필요하다.
학교에 들어간 지 일주일 쯤 지났을 때
학교는 재미있는지 물어봤다.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재밌다고 답하는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어느 날은 잔뜩 신이 나서 오늘 있었던 일을 떠들었다. 자기가 가위질을 섬세하게 잘한다고 친구들이 말해주었단다. 자기는 가위질도 잘하고 종이접기도 잘한다고 우쭐댔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5살부터 매일 두 세 시간씩 종이를 접어대고 가위질을 해댄 결과이다.
그리고 며칠 뒤엔 또 이런 말을 했다.
"난 뭐든 하면 절반은 하잖아."
심지어 하기 싫은 게 눈에 뻔히 보이는 영어 조차도 자기는 중간은 한다면서 큰 소리를 뻥뻥 쳐댔다.
수학은, 사실 수학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의 자리 덧셈 뺄셈을 할 줄 아는 게 고작이지만, 자기는 수학도 쫌 한다며 으스댄다.
지금처럼 현재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데 딱 적당한 수준으로 준비시키는 게 목표다.
한 발짝 앞서서 미리 하는 이유는, 우리집 아들은 너무 어렵다고 느끼면 눈물부터 차오르고 못하겠다며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너무 모르면 덜컥 겁이 나고 머리가 하얘진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난 못한다는 생각의 덫에 걸려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좌절감이 마음을 좀먹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실 "난 뭐든 하면 절반은 하잖아."라는 아들의 호기로운 말에 안심이 되었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수업이 조금 어려워도 비벼볼만 할 테니까.
딱 그 마음이 유지될 정도로만 앞서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앞질러서 가르치고 싶진 않다.
아직 볼이 빵빵해서 깨물어주고 싶은 어린 아이인데, 밤 늦게까지 숙제해라, 공부해라 닦달할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짠하다. 아직은 좀 더 어린이인채로 놓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