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네 가족과 영상통화를 했다.
나의 인간관계는 가족을 제외하면 대학 친구 몇 명이 전부이다. 그 중 한 친구는 동기와 결혼했다. 나하고도 친한 녀석이다. 그 녀석 때문에 한 번 펑펑 울기도 했다. 삼각관계 그런거 말고, 그 녀석이 하도 놀려서 열받아서 울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친구와는 자주 만났지만 그 녀석은 몇 년에 한 번, 오며 가며 만났다. 그래도 한 번 동기는 영원한 동기,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을 목놓아
외치며 함께 어깨동무 하고 앉았다 일어섰다 했던 사이라 그런지 오랜만에 만나도 농담이 자연스레 나온다.
내가 아이와 발리에 가 있는 동안 휴직 중이던 친구가 딸과 저녁 먹으며 종종 영상통화를 하곤 했다. 올 해 친구가 복직을 하며 연락이 뜸했는데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내가 화장실에 가 있던 사이, 할머니 전화인줄 알고 이따가 한다며 안받았던 아들이, 누구 누구 전화라는 말에 “그럼 어디 지금 해볼까?”라며 영상통화에 흔쾌히 응했다. 이래서 내가 늘 우리 엄마에게 잔소리를 한다. 손주한테 쓸데없이 다 퍼주지 말라고. 나한테 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아들 녀석은 결국 다른 여자한테 가게 되있다.
오랜만에 아이들도 어른들도 즐거운 수다에 빠졌다. 친구는 물론 일찍 퇴근한 그 녀석도 함께 영상통화를 했는데 아들의 “물구나무 할 줄 알아요?”라는 도발 한 마디에 그 쪽 부녀가 갑자기 물구나무를 하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다. ‘진짜 왜 저래’라는 친구의 표정에도 아랑곳 없이 그 녀석은 물구나무를 한 채로 20년지기 동기에게 시원하게 배를 드러냈다. 우리 아들과 친구 딸은 그 모습을 보고 웃겨 죽겠다고 난리가 났다.
물구나무 소동이 끝나고 우리 아들의 두 번째 도발이
이어졌다. “풀딱지 알아요?”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왜 책상을 가만히 두지 못할까? 책상에 풀을 바른 다음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서 뭉치는 기술인 듯 했다. 뭐지? 이 낯설지 않은 느낌은? 어쩌면 8살의 나도 풀딱지를 만들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녀석은 아들의 도발에 가소롭다는 듯이 맞섰다. “당연히 해봤지. 아저씨는 휴지심으로 똥도 만들었어.” 똥이란 말에 아들 눈이 번뜩였다. 그만두라고 말할세도 없이 그 녀석은 휴지심으로 똥을 만들어서 변기 위에 올려놓아 엄마를 화들짝 놀라게 했던 일화를 늘어놓았다. 휴대폰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아이 한 쪽 귀를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아들은 이미 그 녀석의 덫에 걸려들었다. ‘휴지심, 똥’에 꽂힌 아들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하필 아들 책상에는 언젠가 뭔가를 만들 때 필요할지 몰라 챙겨두었던 휴지심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인류를 위해 큰 발견을 앞 둔 과학자가 된 것 마냥 진지하게 실험을 시작했다. 비어있는 하리보통에다가 물을 붓고, 경건하게 휴지심를 집어 넣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휴지심은 뭉치기에 적당한 정도로 흐물흐물해지지 않았다. 친구에게 그 녀석의 만행이 끼친 후폭풍을 보여주려고 사진을 보냈더니, 다음 날 그 녀석이 답장을 했다. 휴지심에서 흰 종이를 분리해야 진짜 똥처럼 보인다고. 그런 키포인트는 진작 말해줬어야지! 휴지심을 산산조각 낸 터라 일일이 떼어내려면 손이 많이 들었다. 왜 지금 내가 이걸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엄마와 달리, 아들은 귀찮다는 말 한마디 없이 신중하게 물에 젖은 휴지심 조각에서 흰 종이를 떼어냈다. 여전히 뭉치기에는 종이가 조금 두꺼워서 갈색 종이를 여러겹으로 벗겨냈다. 그리고 마침내 몇 시간 뒤 아들은 그렇게 원하던 똥 두덩어리를 손에 넣었다. 환희에 가득찬 표정으로! 이 두덩어리를 얻기 위해 오전 내내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그림책을 스무권은 읽을 수 있는 시간이며 수학문제집 수십장을 풀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오로지 똥을 만드는 데 쏟아부었다.
아들은 이 발견이 너무 만족스러웠는지 자랑스럽게 똥 두덩어리의 사진을 찍은 후 ‘똥 만드는 법’에 대한 일기를 작성했다.
나는 아들이 정성스럽게 만들어 낸 똥과 그 똥에 대한 일기를 보며 아들을 힘껏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아들이 이 모든 ‘쓸데 없는 짓’을 하는 동안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정말 쓸모 없는 일이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기꺼이 이 모든 일을 함께 했다. 물론 시작전에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었다. 변기에 집어 넣으면 집에서 쫓아낼거라고.
나는 시골에서 자랐고, 부모님은 늘 바쁘셨다. 집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깨진 채 버려진 그릇이나 예쁜 덜멩이를 주워다 소꿉놀이를 했다. 어떤 날은 병뚜껑을 주워서 몇 시간씩 돌로 최대한 넓적하고 평평하게 펴는 작업을 했다. 거기에는 미래를 위한 어떤 목표도 계획도 없었다. 그저 심심했고, 궁금했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하등 쓸모없는 행위지만, 나의 유년 시절은 그런 쓰잘데기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종종 나를 웃음짓게 한다. 내 마음에 한 줌의 여유를 불어넣어 준다. 놀이가 ’창의성’을 키워준다느니 ’사회성‘이 길러진다느니 그런 말은 굳이 하고 싶지 않다. 다만 호기심과 성취감으로 충만한 아이의 얼굴과 너무 재밌다는 아이의 말에 집중할 뿐이다.
어린 시절의 가장 큰 과업은, 최대한 쓸모없는 일들을 시도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게 아닐까. 자기가 뭘 잘하는 지 모르겠다는 아이들을 자주 만난다. 심지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대답하기
어려운 아이들도 있다. 어릴 때 가능한 한 많이 탐색하고 시도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을 겪어야 내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 수 있다. 미래를 위해 가치있다고 여기는 행위는 극히 일부일 뿐이며 그걸로 모든 아이들을 설명할 수 없다. 무심코 했던, 의미 없는 일들이 연결되어 ‘선’이 되고 그 선들이 교차하며 인생의 소중한 한 ‘면’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장난감이 아이의 창의성을 방해한다는 데 어느 정도 동의하는 사람으로써 이런 신박한 놀이는 언제든 환영이다. 휴지심의 쓸모를 재발견하는 값진 시간이었다. 비록 그게 똥덩어리었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