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수요일에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공개수업이 있었다. 1학년 밖에 안 된 녀석이 벌써부터 엄마가 학교에 안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도 가겠다고 했더니 자기는 발표할 생각이 없으니 기대하지 말라고 대뜸 선언을 했다. 내가 발표하라고 닦달한 적도 없건만 기대하지 말라고 선을 긋는 게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아들에게 말했다.
“발표 안 해도 돼. 발표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선생님과 친구들이 얘기할 때 경청하는 거야.”
교실 뒤에 자리를 잡고 서있는데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오지 말라고 했던 녀석에 맞나 싶을 만큼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댔다. 수업이 시작되고 사뭇 진지해진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웠다. 해리포터 영화에 나오는 헤르미온느처럼 발표를 하고 싶어 연달아 손을 하늘로 뻗쳐 올리는 아이들도 있었고 조용히 선생님이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눈에 띄는 두 아이가 있었다. 한 아이는 딱 봐도 개구쟁이처럼 귀엽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아들 말로는 반에서 함께 공부하는 외국인 친구에게 늘 영어로 말을 할 정도로 영어를 잘하는 친구라고 했다. 공개 수업 중에도 수업에서 다루는 동화책에 나오는 동물 이름을 모두 영어로 말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다소 산만하고 동문서답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예전에 아들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자기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는데 그 아이가 자기는 ‘탈 것’을 아주 좋아한다고 말해서 아이들이 모두 웃었다고 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에 비해 한국어가 조금 부족해 보였다. 어릴 때부터 너무 영어에만 많이 노출이 된 건 아닐까 생각했다. 득과 실이 명확했다. 장기적으로는 어떨까? 득이 클까, 실이 클까?
다른 한 명은 옷도 아주 댄디하게 갖춰 입은 남자아이였는데 수업 시작부터 끝까지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무얼 하자고 말을 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호기심을 보이고 열심히 하고 싶어 하는데 이 아이는 유달리 얼굴에 이런 걸 왜 하냐는 듯한, 지겹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내성적인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말씀하는 중에도, 다른 아이들이 발표하는 중에도 혼잣말을 하거나 주변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들말로는 이 친구는 수학 문제집을 20장씩 푼다고 했다. 자기는 맨날 한 장씩 풀어서 우리 엄마가 자기 공부 너무 많이 시킨다고 학교에서 엄마 흉을 봤는데, 이 친구 말을 듣고 놀란 모양이었다. 물론 아이들이라 부풀려서 말했을 수도 있다. 그런 얘기를 이미 들어서인지 이 아이의 태도가 한편으로는 이해되기도 했다. 수업 내용이 시시할 수도 있고 뭔가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지겨운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날 내가 본 모습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아직 어린 새싹이 아닌가.
커서 어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지 그 누구도
아직은 짐작할 수 없다.
나 역시 섣부른 나의 판단을 내려놓는다.
다만 과유불급을 마음에 새겼다.
언제나 문제는 ‘적당히’를 아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