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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은 이름이 있나요?

by Jade

아들은 오디오북 듣는 걸 좋아한다.

발리 여행 중에 책을 들고 가기가 어려워 밤마다 들려주곤 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는 말 그대로 틈만 나면 듣는다. 밥 먹을 때나 자기 전에는 안 틀어주면 생떼를 쓸 정도로 루틴이 되었다. 정해진 TV 시청 시간이 끝나면 재빨리 내 휴대폰을 찾아 거실 블루투스 스피커와 연결하고 오디오북을 튼다. 어떨 때는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며 듣기도 하고, 종이접기를 하며 듣기도 한다. 요즘 한자 공부에 푹 빠져서 한자 문제집을 풀면서 듣는 날도 많아졌다.

무슨 내용인지 알기는 하는 건가 싶어 물어보면

술술 대답이 나와 신기할 따름이다.


전천당, 수상한 가족 시노다, 도깨비 식당, 낭만 강아지 봉봉, 박현숙 작가의 ‘이상한’ 시리즈에 이어 최근에는 역시 박현숙 작가의 책인 ‘마트 사장 구드래곤’에 꽂혔다. 한 번 꽂힌 책은 짧게는 서너번 많게는 수십번씩 반복해서 듣는다. 특히 시노다 시리즈와 ‘이상한’ 시리즈는 너무 많이 들어서 남편과 내가 제발 딴 거 들으라고 사정을 할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마트 사장 구드래곤’은 이제 겨우 세 번 들은 신상이다.


어제도 저녁을 먹으며 함께 ‘마트 사장 구드래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용이 되길 원하는 구렁이 구드래곤이 마트를 열어 아이들의 이름을 원하는 새이름과 교환해주는 내용이었다. 스스로가 나약하고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용기가 있고 힘이 쎄보이는 이름으로 교환을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이는 바꾸고 싶은 이름이 있을까?


“넌 구드래곤을 만나면 바꾸고 싶은 새이름 있어?”

라고 물었다. 아들은 대답은 놀랍게도 간단했다.

“난 OOO. 이 이름면 돼.“

아들이 말한 건 자기 이름이었다.

다른 이름은 필요 없다고. 자기는 충분히 똑똑하고 잘한다고. 대체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건지 궁금했다. 몇 달 전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 난 뭐든 하면 중간은 하는 것 같아. 아, 물론 종이접기랑 수학은 잘하는 편에 속하지만.”

종이접기는 인정하지만, 수학이라…올림과 내림이 있는 덧셈 뺄셈도 수학이라 할 수 있으려나.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는 뭐든 쫌 한다는 아들의 허세에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그 대화 이 후, 자기 이름이면 충분하다는 아들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멤돌고 있었는데, 귀신같이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허준이 교수의 영상으로 이끌었다. 유퀴즈에 출연한 영상이었는데, 근거 있는 자신감은 오히려 너무 유약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확 꽂혔다. ‘나는 늘 1등을 하니까 뛰어난 사람이야.‘라는 자신감은 내가 1등에서 내려오는 순간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다. 반면 ’나는 그냥 지금의 내 모습에 충분히 만족해.’라는 마음은 쉽게 무너뜨릴 수가 없다. 애초에 근거가 없었으니까.


‘그냥 아무 이유 없어. 나는 내가 충분히 자랑스럽고 마음에 들어. 그 누구하고도 바꾸고 싶지 않아.‘


아이 마음에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이 단단하게 뿌리 내리길. 어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토대가 되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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