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파를 그리워하며
느리게 걷다. 하루 산책(冊) 백스물일곱 번째
산에는 질그랭이(‘지긋이, 오래 머물다’라는 제주어) 버티고 있던 여름이가 시나브로 꽁무니를 빼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오색 찬란한 가을이가 병풍바위 앞에 펼쳐진 무대로 짜잔 하고 등장하겠지요. 산을 오르는 내내 여름날처럼 땀이 흐르지만, 가을은 절대 잊혀진 계절이 아니어야 합니다. 제발 와라.
추석 즈음, 작은 우영팟에서 비타민고추를 수확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복도에서 이웃 어르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수확한 녀석의 반을 덜어 가져다드렸더니 며칠 후 어르신께서는 약밥을 만들어다 주셨지요. 계피향 가득한 찹쌀밥 사이에서 씹히는 다양한 견과류의 개성이 맛깔스러워 냉동실에 넣고 아껴먹는 중입니다. 특히 오늘처럼 산에 오를 때는 냉동실에서 한두 개 꺼내 배낭 깊숙이 넣어두면, 점심때쯤 먹기에 딱 좋을 만큼 해동되어 있답니다. 어제 친구에게서 받은 단감과 함께 가을을 꿈꾸며 먹는 산상 혼식에 제격인 메뉴이지요. 몰래 따고 온 주목 열매는 후식입니다.
주목, 마가목, 섬매발톱나무의 빨간 열매가 가을을 선언하는 선두에 나서니 용담, 한라구절초, 한라부추가 그 뒤를 따릅니다. 나비들은 많이 줄었지만 산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소철꼬리부전나비를 만났고, 몇 송이 남지 않은 바늘엉겅퀴에 몰려온 네발나비, 작은멋쟁이나비도 만났습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나비를 만나기는 어렵겠지만, 산에 사는 야수파들의 오색찬란한 걸작들이 기대됩니다.
#제주의나비 #영실기암 #네발나비 #작은멋쟁이나비 #소철꼬리부전나비 #벌꼬리박각시 #나비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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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은 실재와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색을 쓰기 시작한 선구자입니다. 자신이 느낀 바를 틀에 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색채로 자유롭게 표현했습니다. 지금에야 흔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고정관념을 고갱이 깨부순 것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바보 같거나 미친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 발상은 20세기 초 야수파 탄생의 핵심 요소가 됩니다. 1905년, 마티스는 자기 부인의 얼굴을 일반적인 피부색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대신 ‘빨주노초파남보’를 치덕치덕 바른 <모자를 쓴 여인>이라는 작품을 전시에 내놓죠. 이건 사람이 나인 ‘야수’를 그린 거라는 어느 비평가의 조롱은 그대로 ‘야수파’라는 화파의 명칭이 됩니다.
방구석 미술관, 조원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