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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다. 하루 산책(冊) 백서른 번째

안개 그리고 오름

by 나비할망

눈이 부셔 차에서 내리자마자 모자를 깊게 눌러씁니다. 은은한 아침 햇살마저도 마주할 수 없는 악성 노안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내 눈은 소중하니까.

함께 모인 일행들에게 오늘 조사할 내용에 대한 공지를 간단히 마치고 제주도 동쪽 마을로 향합니다. 출발한 지 십분도 채 되기도 전에 시야가 뿌예지더니 안개가 몰려오네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 부신 햇살에 소심한 방어를 아니 할 수 없었거늘 이번엔 안개가 출몰해 또다시 시야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하네요. 안개등과 비상등을 켰다 껐다 반복하며 제주도가 이토록 넓은 땅이었던가 아니던가 속없는 질문만 떠올렸다 지웠다 해봅니다.


오름 들판에서 붉게 빛나던 피뿌리풀을 처음 만났습니다. 10cm를 조금 넘을까 싶은 작고 가느다란 타래난초를 보며 감탄하는 투박한 외형의 아저씨들을 보며 ‘뭐 저런 아저씨들이 다 있담’ 하고 깜짝 놀랐던 곳도 이곳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계기가 되어 무려 25년째 제주 생태의 바다에서 떠돌고 있긴 합니다만, 아부오름은 그때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입니다. 어쩌면 유난히 눈부신 아침 햇살과 부스스한 안개라도 뿌려서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 아부오름의 진상을 덜 보게 하고, 못 보게 하고, 안 보이게 하고 싶어 오름신이 요술을 부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름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전망대, 탐방로 양쪽으로 나란히 심어진 산수국 행렬, 분화구 아래로 내려가는 길 능선이 깎이며 경화(莖化)된 곰솔 뿌리, 눅눅하고 시커멓게 파인 숲길과 어둑어둑한 삼나무숲. 많이 달라지긴 했네요. 집결지에서 일행들과 떠들 때만 해도 오늘은 나비들도 많이 볼 수 있겠다 기대했지만, 아마 날이 좋아도 예전만큼은 초원의 나비를 많이 볼 수 없을 것 같을 정도로 아부오름 풍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숲의 천이’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델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좋습니다. 세월이 묻어있는 지금의 아부오름도 좋습니다. 고작 날개 다친 제비나비 한 마리밖에 못 만났지만 그래도 추억의 아부오름은 여전히 나의 첫 오름입니다. 키가 커지고 덩치가 불어난 곰솔이 오름의 조망권을 전부 차단했기에 전망대가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피크닉 할 수 있는 풀밭 만들겠다고 이 많은 나무들을 다 베어내느니 전망대 자리 하나 내어 주는 것쯤은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산수국 행렬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유행이라지만 SNS 숏폼처럼 뭔가 단시간에 눈길을 잡아둘 수 있는 화려한 것들이 아부오름에 굳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까짓 산수국 여기저기 오름마다 다 똑같이 심어다 놓으면 아부오름만의 자연스러움은 뭐가 있을까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니거늘.

같지만 다른 모습으로 곰솔을 타고 오르는 송악 잎이 신기하다고 감탄하고, 이슬이 총총히 맺혀 한층 더 싱그러운 나무의 새순과 작은 꽃잎에 머리를 조아릴 줄 아는 특유한 감각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요? 오름에서 보고 싶은 화려한 것들을 부자연스럽게 옮겨다 놓기보다는 자연의 멋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싶어지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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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에 벌들에 빠져 있던 어느 교수님의 동물행동학 수업에서 배웠던 뭔가가 기억났다. 교수님은 생물학자들이 ‘움벨트umwelt’라 부르는 것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움벨트는 글자 그대로 ‘환경’ 또는 ‘주변 세계’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지만,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그 단어로 더 구체적인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 생물학자들에게 움벨트란 지각된 시계, 즉 한 동물이 감각으로 인지한 세계를 의미한다. 각 종이 지닌 특수한 감각 및 인지 능력에 의해 키워지고, 그 종에게 결핍된 부분에 의해 제한된 결과 그 종이 특유하게 지니게 된 시각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이 용어는 익숙하지 않지만, 그 개념은 아주 익숙하다. 우리는 개들이 색깔을 볼 수 없어서 색채가 아니라 냄새로 그려진 우주에서 산다는 걸 안다. 멍멍이가 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기둥과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 교수님이 애지중지하던 벌들은 다면적인 구조의 눈으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외선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벌들은 꽃에서 꿀이 있는 위치로 정확히 날아갈 수 있다. 꽃에 자외선으로 그려진 띠와 줄 패턴이 벌들을 그 자리로 안내한다. 하지만 움벨트는 개와 벌뿐 아니라 모든 동물에게, 심지어 인간에게도 있다. 우리는 그걸 ‘실제’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우리를 둘러싼 생명의 세계에 대해 우리 특유의 감각이 그려낸 그림이다. 그런 게 바로 움벨트다.

- 자연에 이름 붙이기, 캐럴 계숙 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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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잎할미꽃   아부오름 DSC_7477.jpg
가는잎할미꽃  아부오름 DSC_1174.jpg
가는잎할미꽃
곰솔 수꽃  아부오름 DSC_7485.jpg
비목나무 꽃  아부오름 DSC_7459.jpg
곰솔 비목나무
두눈박이쌍살벌  아부오름 DSC_7400.jpg 두눈박이쌍살벌
보라애기가지나방  아부오름 DSC_7483.jpg 보라애기가지나방
제비나비 날개 상처  아부오름  DSC_7420.jpg 제비나비
제비꽃  아부오름 DSC_7388.jpg 제비꽃
찔레꽃   아부오름 DSC_7445.jpg
참식나무 새순  아부오름 DSC_7487.jpg
질레꽃 참식나무
콩제비꽃 핑크색 꽃   아부오름 DSC_7447.jpg
털제비꽃  아부오름 DSC_7457.jpg
콩제비꽃 털제비꽃
송악  아부오름 DSC_7437.jpg
송악    아부오름 DSC_7441.jpg
송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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