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할망의 관찰 일지 – 올레 11코스

2025년 12월 29일 모슬포-무릉 올레(하편)

by 나비할망

‘신평-무릉사이 곶자왈’에 들어서기 전, 신평편의점 테이블에서 점심시간을 가졌습니다. 집 반찬 몇 가지와 밥, 편의점에서 산 사발면이 고작인 소박한 밥상입니다. 지난 4월부터 한 달에 한 번 올레길을 걸어보자 마음먹으며, 작은 실천 몇 가지를 정해두었답니다. 일회용 용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 시작점과 종점까지 가는 교통수단은 버스를 이용할 것, 올레길이 있는 마을에서 반드시 소비하고 올 것. 처음 몇 달 동안 함께 걷는 동무가 텀블러를 챙겨오지 않았던 것을 빼면 이 약속들은 비교적 성실하게 지켜져 왔고, 내년에도 이 소소한 원칙에는 변함이 없을 생각입니다.


이미 지나온 거리가 남은 거리보다 길어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배를 채우고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포근한 숲길에 들어섰기 때문일까요. 걸음에 갑자기 피로가 내려앉았습니다. 수확하지 못한 감귤밭을 지나며, 저 탱글한 귤 하나만 슬쩍 따 먹으면 눈이 번쩍 뜨일 것 같다는 유혹이 스쳤지만 꾹 참았습니다. 이미 뜯긴 흔적이 적지 않아 괜히 마음이 뜨끔했기 때문이지요. 한두 해 겪는 일도 아닐 텐데, 밭 주인들은 올레꾼들을 곱게만 보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흔한 망사 울타리조차 두르지 않은 과수원을 마주하면 과수원 지기의 너른 품성이 경이로울 정도였지요. 곶자왈 입구에 세워진 안내문에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 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걷는 사람/하정우”라는 글을 비타민제로 삼아봅니다.


커다란 팽나무에 색 바랜 물색(제주의 전통 신당에서 신을 상징하는 나무나 돌에 장식하는 오색 천)이 걸린 신평 본향당을 뒤로하고 숲에 들어서자, 동글동글 동글이들이 숲 바닥에 굴러다닙니다. 도토리입니다. 신평-무릉사이 곶자왈은 빌레(편평한 바위)길 사이로 종가시나무, 참가시나무, 상수리나무 등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들이 빼곡한 숲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초가집 지붕으로 쓰이는 새(띠)가 자라는 새왓(왓=밭), 정씨성을 가진 이가 들어와 일구었다는 정개왓, 오찬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굴 오찬이궤, 형제가 숯을 구우면서 생활했던 성제숯굿터, 소를 방목하여 키울 때 설치한 쇠 물통까지. 지금의 울창한 숲 모습이 아닌 풍경에서 살아온 옛 마을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밑동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 도토리나무들 역시, 한때 사람의 손길이 스쳤던 흔적 중 하나이지요. 다만, 녹슬고 색 바랜 안내문과 덩굴에 가려진 쇠 물통을 보며, 마을 이야기들이 너무 무심히 사라지는 건 아닐지 작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개구리 세 마리와 팽나무 세 그루가 지키고 있는 구남못을 지나, 무릉 외갓집에서 종점 스탬프를 찍습니다. 비타민 대신 외갓집 카페인으로 남은 기운을 끌어모아 버스에 몸을 실어야 할 시간입니다. 무겁고 지난했던 2025년의 흔적들은 무릉리 외갓집 마당에 살짝 뿌려두고 갑니다. 2026년에는 그 흔적들이 잘 영글어, 조금은 가벼운 걸음이 되기를 바라며.


새해 복 많이 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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