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9일 모슬포-무릉 올레(상편)
2025년 마지막 올레길은 모슬포에서 무릉까지 총 17.3km 거리의 11코스입니다. 가을 끝자락에 종점을 찍었던 하모체육공원을 다시 출발점으로 삼아 바다와 육지가 천천히 자리를 바꾸는 길 위에서 스탬프를 사뿐히 즈려 찍습니다. 처음 2km 남짓은 파도의 숨결이 발목을 붙들지만, 그 길을 벗어나면 오름과 곶자왈, 그리고 농부의 발자국이 박혀 있는 마을 길이 차례로 열립니다. 계절이 저물고 해가 바뀌기 직전, 마을 길 위에 떠다니는 구름이 유난히 조용합니다.
작은 배가 정박해 있는 하모항과 하모 3리의 용천수 산이물을 지나면, 제주스럽지 않은 자갈돌과 제주스러운 투박한 자갈돌이 길을 가로지릅니다. 레고 블록처럼 쌓아 올린 무지갯빛 제방은 돌고래 체험을 위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네요. 돌고래를 뜻하는 제주어로 표기된 ‘수애기’와는 동떨어진 풍경이 낯설기만 합니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자 밭 하나 가득 개똥참외 열매가 흩어져 있고, 계절을 잊은 듯 무와 마늘, 쪽파의 푸른 줄기가 하늘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있습니다. 신기하게도 바다와 가까운 마을에서는 황톳빛 흙밭에서 자라고 있던 무가 모슬봉 아랫자락에 있는 밭에서는 죄다 자갈돌로 덮인 밭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과연 어느 쪽 무가 더 달고 맛날까요?
수련이 자라던 연못을 뒤로 하고 모슬봉 중턱에 이르자 작은 동자석 세 쌍이 발길을 붙듭니다. 모자와 얼굴 표정, 손을 가지런히 모은 자세는 제각각인데 코만큼은 하나같이 닳아 있네요. 돌하르방의 속설이 이 작은 석상들에게까지 미쳤는지 닳아버린 코 위로 시간의 농담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아들이 뭐라고, 그렇게들 만지고 또 만졌을까.
해발 181m의 야트막한 모슬봉은 조선 시대에 봉수가 있었던 오름 중 하나로, 『탐라순력도』(한라장촉)에는 봉수의 기능을 살려 '모슬망(摹瑟望)'이라 기록되어 있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공동묘지를 지나 중턱에 이르니 바닥 한가운데 떠 있는 형제섬을 비롯해 오름 동쪽에 자리한 단산과 산방산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오고, 구름이 삼켜버린 한라산과 오름군을 파노라마처럼 ‘망(望; 멀리 바라보다)’할 수 있네요. 정상부에는 군사 시설이 들어서 있어 조선 시대 제주인이 누렸을 풍광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대신 오름 숲길에서는 상록활엽수 사이로 깡마른 하얀 수피가 도드라진 어린 천선과나무가 유독 눈에 많이 들어왔답니다.
노란 유채꽃과 하얀 냉이꽃이 다글다글 피어있는 밭 사이를 지나, 물세례를 맞는 마늘밭과 베트남 모자를 쓴 외국인 노동자들이 즐거운 수다가 묻어 있는 브로콜리밭을 통과하니 어느덧 11km를 넘겼습니다. 이제부터 남은 길은 나무의 숨결이 더 크게 들리는 곶자왈 숲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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