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상 딸네미, 고물상 운영하다.
동생이 시집가던 해.
아버지는 사위 둘을 앉혀두고 30년 넘게 키워온 고물상을 다른 사람에게 그냥 넘기기엔 너무 아깝다는 말씀을 하셨다. 둘 다 이어받지 않겠다 하면 점차 규모를 줄여 나가 마무리를 지을 것이라고, 그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우리가 물려받자는 결론을 내렸다.
“미나야~! 오빠 믿고 딱 오 년만 고생하자!”
대신, 엄마처럼 힘들게 마당 일이나 배차 다니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며 오로지 사무실에 앉아 거래처 관리만 해달라고 했다.
그 외에 모든 일은 혼자 알아서 할 자신 있다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일을 모르는 자의 생각일 뿐.
남편이 하겠다 마음을 먹었으면 나 역시 함께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엄마를 봐서 예상하고 있었다.
‘여장부’ 소리를 들었던 거침없이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게 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한숨과 함께 자신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못해!
나는 절대로 엄마처럼은 못해!
애초에 시작하지 말아야 해!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남편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아 세웠다.
“애들 어릴 때 자리 잡아야지! 지금 내 하는 일보다 훨씬 낫다. 아버님 꺼 그대로만 받아가 해도 우리 다섯 식구 충분히 먹고 산다! 니 내 못 믿나!”
그를 믿지 못하는 것보다 오히려 문제는 내쪽이었다.
크면서 그렇게나 다짐했던 것이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아니던가!
그런 내가 어찌 엄마의 뒤를 밟는 단 말인가!
365일 날씨와 싸워가며 온갖 힘쓰는 일은 다 해야 하고, 무엇보다 삶의 여유가 없어진다는 것이 나를 가장 망설이게 했다.
더워서 땀 흘리는 것도 싫어하고, 추워서 벌벌 떠는 것도 싫어하는 집순이인 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어려워하고, 무엇보다 숫자에 약했다.
그런 내가 고물상을?
어휴... 생각만으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안 되는 일이었다.
“딱 오 년만 고생하자! 오 년 뒤에 벤츠끌고 다니게 해 줄게 오빠야가!”
한 달 뒤.
우리는 대구 집을 급매로 처분하고, 상경했다.
누가 최 씨 고집이 가장 세다고 했을까? 윤 씨 고집이 최 씨 고집을 이겼다.
공주처럼 사무실 책상 앞에만 앉아 일하게 해 준다는 약속을 앞세워 딱 5년만! 큰 아이가 중학교 가기 전에 다시 살림만 할 수 있게 해 준다 했다.
그땐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다녀도 간섭 안 하겠다고, 자리를 잡고 안정기에 접어드는 기간을 딱 5년으로 예상했다.
상경 후 6개월 남짓 친정부모님과 남편이 함께 일을 했다.
인수인계를 다 받고 부모님이 하시던 터전에서 이사를 나와 경기도 고양시 도내동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온전히 우리 둘만의 사업장.
<사업자등록증>을 새롭게 발급받고 남편의 이름으로 명함과 도장도 새로 팠다.
자연스럽게 역할도 나뉘었다.
남편은 거래처들 다니면서 1톤 화물차로 물건을 수거해 와 고물상 마당에 대충 하차해 놓고 다른 거래처에 수거해 오는 배차 작업을 위주로 하게 되었고, 그 사이 엉망이 되어버린 마당을 정리하고 종류별로 분류하는 작업은 사무실에만 있기로 한 내 몫으로 고스란히 남겨졌다.
예상은 했지만, 마당 일이 훨씬 더 많았지만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종이 고르는 일이야 어릴 때부터 종종 돕던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작업철 분류하는 일...
종류도 많고 장비들이 무겁다 보니 손목에 무리가 가고, 나사를 풀고 기판을 빼내고 전선을 자르는 아주 단순한 일임에도 쉽게 지쳤다.
그렇지만 종이만 붙들고 있자니, 단가에서 차이가 많이 났다.
하나라도 더 분류하고 하나라도 더 내 손을 거쳐야 수입으로 이어지니 어쩌겠는가!
부지런히 나누고 정리해서 상품 가치를 더 올리는 수밖에...
하나로 질끈 동여맨 머리, 커다란 챙모자, 여름에도 긴팔 긴바지, 선크림을 얼굴에서 이어지는 목까지 꼼꼼하게 발라도 늘 투톤으로 이쁘지 않게 그을렸다. 매일 깨끗하게 갈아입어도 온갖 흙먼지며 뭔지 모를 오염물들이 작업복에 흔적을 남겼다.
아침마다 호기롭게 바르던 BB크림도 땀에 얼룩지고 눈에 흘러 들어가면서는 아예 바르면 뽀송해지는 느낌의 선크림만 바르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거울을 보면서도 ‘아... 이런 모습을 원했던 건 아닌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언제까지 어리광을 피울 수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엄마>라는 직함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미나야. 거저 엄마 되는 거 아니야! 하고 싶은 거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못살아! 근데 어떡해! 살아야지 애들 굶길 거야? 애들만 생각해! 너만 보고 있잖아. 너 없음 애들은 다 죽어!”
익숙하지 않은 힘쓰는 일이 힘들고 새벽부터 어둑해질 때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이라 지쳤다.
그뿐인가 집에 와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할 일이 이어지고, 애들은 유별나게 엄마만 찾았다.
새벽에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남편에게 혹 지장이 될까 싶어서 되도록 집에 오면 온전히 쉬는 것만 하도록 했던 것이 날이 갈수록 내게는 짐이 되었다.
속으로 삼키기만 했던 분노와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져 결국 만만한 엄마에게 울며 전화를 해버렸다.
한참을 말없이 듣기만 하던 엄마가 무심하게 해 줬던 말이다. 그러면서 엄살 그만 부리라고 조금은 냉정하게 느껴졌던 그날의 통화 이후 묘하게 또 버틸 힘이 생겼다.
그래 거저 엄마가 되겠나! 또 견디다 보면 좋은 날 오겠지! 왜 못해! 다들 사는데!
내가 뭐가 부족해서?
우린 아직 젊고, 아이들도 어리니 부지런히 자리 잡으면 진짜 5년만 딱 고생하고 애들 키우면서 살림만 하고 살아야지 다짐했다.
친정 부모님이 물려주신 거래처는 워낙에 탄탄하고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곳들이라 우리 다섯 식구 생활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보통 십 년 이상 거래를 했던 곳들이라 우리가 크게 신용 잃을 짓을 하지 않는다면 빠른 시간 안에 자리 잡고 여유롭게까지는 아니어도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될 정도였다.
그게 얼마나 큰 재산인지도 몰랐던 그때는 갑자기 욕심이란 것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때마침, 기존에 하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의 일을 시도해 보자고 옆에서 들쑤시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가 그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고 솔깃해버렸다.
돈의 유혹,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고.
쉽게 벌 수 있는 돈은 세상에 절대 없다는 아주 단순 명료한 진리를 아주 가볍게 무시했다.
모든 유혹의 시작이 그렇듯 우리의 시작도 찬란했다.
한 치 앞도 모르고 신나서 방방거리는 사이에 빠르게 어둠은 찾아왔다.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인데... 그 단순한 진리를 놓친 대가는 혹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