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지나친 욕심이 부른 화

일찍 철이 든 아들.

by 십이월의봄날

처음부터 자신감이 넘쳤다.

친정아버지와 함께 운영을 배우던 시기에 퇴근만 하면 ‘우리는 조금 더 공격적인 운영을 해야 한다.

시대는 변하고 있고, 고물상도 변화를 모색해야 경쟁력이 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무조건 안정형이던 아버지와는 달리 남편은 적극적이고 모험형이었다.

운영에는 답이 없고, 어느 방식이 맞는지도 없다.

다만, 도전에 따른 결과를 고스란히 이겨 낼 자신이 있느냐가 중요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큼직한 거래처들은 주로 학교들과 증권가가 밀집되어 있던 여의도와 마포 쪽 빌딩들이었다.

첫째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 역시 많지 않았던 때라 기회라고 했다.

기존 아버지가 하던 거래처를 반으로 줄이고, 신규로 이제껏 하지 않았던 거래처들을 여러 군데 늘리고 취급 품목 역시 늘려 종이류 외에서도 수입원이 생기도록 영업 방식을 변경했다.

금방 보이는 성과는 좋았다.

종이류(우리 업장의 주 종목은 파지류_종이 중에서도 최하 단가) 였으니, 당연히 고철과 알캔 작업철의 비중을 늘리면서 자연스럽게 수입은 늘어났다.

이른 아침부터 쉼 없이 현장 마당일과 배차를 따라다니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그저 행복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서울 하늘 아래 집을 사게 되는 날이 올 것만 같았다.

집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나는 무조건 ‘내 집’에서 살고 싶었다.

어린 시절에 이사를 다니며 전학을 다녔던 추억들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든 기억들이었다.

내 아이들만큼은 그런 기억들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

오로지 그 마음으로 신나고 들떴더랬는데, 역시나 욕심이 너무 과했다.

사업장 자체는 아버지가 했던 세월이 있으니 오래된 업체에 속했으나, 아버지가 뒤로 물러난 시점에서의 우리 업체는 신규 업체와 다를 것이 없었다.

신뢰를 채 쌓지 못하고 새롭게 일을 늘린 데다가 업체를 중간에서 연결해 줬던 중개인이 사기를 쳤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우리가 계약한 사실과 상대 업체와의 계약 내용이 달랐다.

심지어 우리 상호를 마치 본인이 운영하는 업체인 냥 중개인이 장난질을 치고 다녔다는 사실까지 알아버렸으나 일은 이미 벌어지고, 중개인은 사라졌다.

손해는 막대했고, 거래처는 늘어났으나 돈이 안 되는 곳들만 남았다.

뭘 몰랐던 우리는 중개인에게 거액의 돈을 줘가면서 신규 거래처를 뚫어달라고 청탁까지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만 착실하게 기존 업체와의 신용도만 올리면 자연스레 입소문으로 신규 거래처는 생기는데, 욕심만 앞섰을 뿐 무지했다.




다시 처음.

기존 아버지가 물려주신 거래처는 아버지의 방식대로 실수 없이 최선을 다해 수거했다.

시간, 날짜,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수거를 다 하고 난 뒤에 깨끗하게 뒷정리하고 나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규 거래처들도 수입으로 이어지든 아니든 일단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모든 업체에 물량들을 소화했다.

남편과 나 둘이서 하루 24시간 중에 통잠은 2~3시간만 자고 일하다가 피곤하면 사무실이나 차 안에서 쪽잠을 자가면서 일했다.

아직 어렸던 아이들을 고모네와 이모네 할머니네 옮겨 지내기를 몇 주 반복하던 어느 날 큰 아이가 말했다.

“엄마! 그냥 우리 집에 있을래. 내가 애들이랑 잘 있을 수 있어.”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이던 큰 아이에게 7살 5살 두 동생들을 부탁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자정 무렵에 조용히 문을 닫고 일터로 나가면서 마음엔 돌덩이가 들어앉았다.

아이들만 두고 가는 것 그 자체가 죄책감이 되어 마음에 상처를 냈다.

우리 수입의 60% 이상을 담당하던 대학교의 작업이 보통 새벽 1시에 시작하면 이른 아침 5~6시경에 마쳤다.

현장(고물상)으로 들어가기 전에 남편은 집 근처 큰길에서 내려주었다.

밤에 아이들 곁을 지켜주지 못한 대신에 꼭 학교는 내 손으로 보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피곤이 쌓이고 잠이 부족해지면서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 아침을 준비해야 할 시간에 자꾸만 잠들어버렸다.

엄마가 잠들면 큰아이는 조용히 엄마가 깨지 않게 빵이나 시리얼을 준비해서 조용히 자기들끼리 먹고 막둥이 유치원 등원 준비까지 완료해 놨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뜨면


“엄마~내가 다했어! 조금 더 자~내가 학교 갈 때 깨워줄게”


하고 불 꺼진 방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2~30분 단잠을 자고 다시 일터로 향했다.

혹 아이들이 아픈 날이면 극도로 예민해져서 툭하면 울었다.

마음은 집에 몸은 일터에, 예민해진 신경 탓에 일의 진도는 더디고 사실 운다고 도움 될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땐 왜 그렇게 서러운지... 그때도 큰아이는 밤새 동생들을 지켰다.

시간 맞춰 약을 먹이고, 혹 오바이트나 설사를 하면 다 치우고 씻기고 옷 갈아입혀 다시 재웠다. 그뿐이던가!

방학이면 신나게 놀다가도 동생들 하원시간이나 식사시간이 되면 집에 가서 동생들 챙기기 바빴던 큰애의 그 무렵 별명은 <윤데렐라> 였다고 했다.

나와 남편의 눈물버튼 윤데렐라, 큰아이.

다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었던 때마다 우리를 일으켜 세워준 큰아이는 그 악명 높다는 사춘기도 무던하게 지나갔다.

스무 살이 된 지금까지도 크게 속 썩이는 거 없이 엄마에겐 늘 배려 넘치고 속 깊다.

세살, 두살터울의 동생들도 그런 큰아이의 영향을 받아 서로가 서로를 잘 챙기고 우애 깊다.

그리고 다른 집 아이들보다 우리 집 아이들은 좀 일찍 철이 들었다.

그런 아이들이 있어 버텨야 했다.


우리는,

밤을 새워야 하는 일도 마다 앉고, 주어진 일에는 늘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제법 거래처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젊은 부부가 참 성실하다’라는 말도 영광의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그로 인해 소개받는 거래처도 늘어났고, 가장 큰 거래처였던 대학교를 갑자기 못하게 된 큰 고비 때도 잘 넘겼다.

그리고 그제야 알겠다.


‘성실이 답이다!’

무슨 일에든 순서가 필요하다는 것도.

급하다고 두세 계단을 한꺼번에 올라가다가는 뒤로 나자빠지기기 십상이라는 것.

천천히 step by step.

뼈아프게 고생하고 나서야 귀한 깨달음을 얻은 지금은 아무리 급해도 요행을 바라지는 않는다.

매년 내년엔 나아지겠지, 일 좀 줄여도 되겠지 하면서 일 년 또 일 년을 보내지만 여전히 하루 24시간을 쪼개 살아야 하고, 여전히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순간이 더 많다.

더더군다나 아이들이 운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남편 혼자 짊어져야 하는 무게게 조금 더 늘었다.

(내가 아이 뒷바라지 한다고 자주 자리를 비우기 때문...)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루에 처리해야 하는 거래처의 배차 수는 늘 남들의 두 배~세배는 많고, 마당에 선별해야 할 물건들이 차고 넘친다.

아직은 젊으니 한 5년만 진짜 더 고생하면 우리도 여유를 좀 가지고 살 수 있을까?

라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눈뜨는 순간부터 마감시간까지 최선을 다하려 애쓴다.

이 애씀의 순간들이 모여 여유라는 기쁨의 열매를 수확할 날이 곧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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