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석했다. 유독 한 선배의 얼굴에 근심이 담겨 있었다. 평소 성격이 무척이나 밝고 말도 활기차게 하는 그 선배에게서 그날따라 어두운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로 뜸을 들이다가 갑자기 그 선배가 한 마디를 툭 내던졌다.
“나 ERP 신청했어.”
ERP가 어떤 이들에게는 ‘Entreprise Resource Planning(전사적자원관리)’이라는 의미로 들리겠지만, 여기서 ERP는 Early Retirement Program의 약자로서 '조기퇴직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보다 보편화된 표현으로는 ‘희망퇴직’이 있다.
그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희망퇴직?, 왜?, 계획은?’ 등과 같은 질문이 순식간에 모두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후 대화의 주요 질문과 대답,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다. ‘그럼 언제까지 다녀? 보상은 몇 개월치야? 앞으로의 계획은? 그래 잘 생각했어. 앞으로 잘 될 거야.’ 순으로 이어지는 무덤덤한 말들. 맞다, 그들에게 이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는 경험이나 직관에 기반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경험이 있어야 유리하겠지만 한 개인이 모든 경험을 가질 수는 없으므로 직관에 의존해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ERP를 대하는 다른 참석자들의 그 무덤덤함은 그런 직관에서 나왔으리라... ‘몇 년치의 보상을 받고 퇴직했으니, 충분한 시간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고, 조급해하지 말고 여유 있게 더 나은 인생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는 기대와 낙관적 전망.
내 인생에서 한때 세상살이가 매우 힘든 적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고, 눈을 뜨면 찾아오는 가슴 저림에 아팠고, 담배에 의지해야 하는 내 처지가 싫었다. 내 미래가 어떻게 풀릴지 알 수 없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짐에 짓눌려 있던 시절이었다.
ERP를 좋은 의미로 정의하면 이렇다.
“직원들에게 일정 규모의 금전적 보상을 통한 퇴직을 유도해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어떤 이에게는 ERP가 목돈과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주는 황금 같은 기회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인생의 커다란 시련이다. 그 선택이 비록 자의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아직 퇴직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는 피해갈 수 없는 관문이 기다린다.
최근에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읽었다. 책의 내용이 난해해서 책을 읽은 후에 내게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워낙 유명한 구절이 있어 그 구절만은 기억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ERP 퇴직자 또한 알을 깨고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고 믿는다. 보다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 또한 그러했다.
주식시장의 가장 큰 위험 요소는 ‘불확실성’이다. 주가가 폭락하는 날은 ‘불확실성’이 가장 크게 지배하는 날이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농무 속 도로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퇴직 후 인생의 미래가 안개처럼 뿌옇기만 한 사람에게 하루하루는 근심, 불안, 초조로 가득 찬 쳇바퀴 나날이다.
점차 그 선배는 자신의 길을 잘 찾아갈 것이다.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그런 믿음과 노력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리라.
그래도 혹시 주위에 내 선배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래와 같은 말을 건네 보자.
“따로 한번 보자.”, “술 한잔 하자.”, "밥 한번 먹자."
진짜 만나 밥도 사고 술도 사면서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고민을 들어주고 미래에 대한 좋은 의견을 나누어 보자. 그러다 갑자기 그가 왈칵 울지도 모른다. 그럼 당황하지 말고 그의 마음이 ‘정화’되도록 잠시 기다려주자. 우리에게는 때로 '뜨거운 눈물'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